사람들은 흔히 『이 세상에서 나만큼 불행하게 태어나서 고생하며 산 사람도 없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갖는 수가 많습니다. 그래서 그 불행 그 고생을 이겨낼 생각도 않고 비관과 원망의 나날을 보내는 사람도 있는 듯합니다. 그런 분이 계시다면 꼭 저의 얘기를 한 번 들려드리고 싶어 이렇게 글을 쓰는 것입니다. 읽고 나신 다음엔 아마 세상에는 나 말고도 기구하게 태어나 묘하게 풀려서 고생 깨나 한 사람이 많은 법이구나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실 것입니다. 얘기는 1965년 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자 천팔백 원 세어보세요』
혈액은행 창구에서 내 귀중한 피를 판 돈 천팔백 원을 쥐고 나는 거리로 나왔습니다.
그래 이제 이 돈이면 밥도 사먹을 수 있고 하룻밤 숙소도 정할 수 있다. 그래 우선 식당을 찾아 싸고 많이 주는 음식을 배불리 먹어보자』
나는 희망에 차서 급한 걸음을 재촉했습니다.
『앗? 내가 왜 이러지? 아! 어지러워. 횡횡 도는 구나 집들이 차들이 아!』
나는 길바닥에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한참 후에 눈을 뜬 곳은 어느 병원 침대 위였습니다.
『정신이 좀 드세요?』
참하게 생긴 아가씨가 친절하게 물었습니다. 나는 그 착한 아가씨의 덕택으로 병원에서 안정을 되찾고 특별히 그 아가씨의 손님이 되어 한 끼의 밥과 따끈한 차를 대접받게 되었습니다. 송영애라는 그 아가씨는 홀에 나가 생계를 유지하는 가엾은 아가씨였습니다. 나는 그의 착한 마음 때문에 나도 모르게 내 지나온 얘기를 모두 들려주게 된 것입니다.
일본에서 태어난 나는 4살 때 부모를 잃고 이모의 슬하에서 자랐으나 「히로시마」의 원폭 투하로 이모를 잃고 나는 천애고아가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거지가 되어 거리를 방황하다 고아원에 들어가게 되었지요.
전쟁이 끝나자 고아원 원장은 나를 한국인의 양자로 알선해 주었습니다.
그때 내 이름 권도운이도 지어진 것이지요. 양부를 따라 한국으로 왔어요. 그러나 6ㆍ25동란으로 양부모마저 세상을 떠나고 다시 고아가 되었지요. 구두닦이 신문 배달 껌장사 등을 하면서 간신히 연명해 나가던 어느날 불량배에게 모진 매를 맞은 뒤부터 양아치로 전락, 온갖 사회악에 시달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기까지의 얘기를 듣던 송영애는 갑자기 그 뒤의 얘기를 다그쳐 묻는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듣고 보니 정말 우연이지만 뭔가 짚이는 데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나는 선뜻 그 다음 얘기를 들려주었지요.
어느날 나는 김숙영이라는 처녀의 도움으로 불량배에게서 벗어나 그 처녀가 경영하는 양품점의 점원이 되었던 것입니다. 숙영이가 실화 혐의로 교도소 신세를 지게 되자 다시 의지할 곳 없게 된 나는 온갖 직업을 전전하며 헤매게 되었던 것이지요.
별고생을 다 했습니다. 결국 혈액은행까지 찾게 되었다는 나의 얘기를 듣던 송영애는 눈을 반짝이며 김숙영의 얘기를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김숙영이가 송영애의 아는 언니였던 것입니다. 나는 그러한 우연으로 누나 같이 생각하던 김숙영을 다시 만나게 되고 비록 나이는 남보다 뒤지지만 우리는 서로 사랑하기 때문에 결혼을 하게 된 것입니다. 난생 처음으로 행복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귀여운 아기도 태어났습니다. 나는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그러나 설상가상으로 숙영이는 정신병자가 되어 집을 나가고 끝내는 익사하고 마는 불행을 겪었던 것입니다.
나는 이웃 사람들의 권유로 아기를 남의 집 양자로 맡기고 일본 밀항을 기도했습니다.
그때의 나의 심경은 완전히 자포자기 상태였으니까요. 양자로 전전하던 인생이 자기 자식까지 남의 양자로 주어야 하는 기구한 운명을 나는 울고 또 울었습니다. 마침내 어떤 남자의 소개로 일본 밀항을 기도했으나 돈 5만 원만 사기 당하고 좌절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당연한 결과였지요. 옳은 일을 해도 어려운 세상에 그런 비뚤어진 생각을 했으니…일이 제대로 될 리가 만무했습니다.
다시 직업을 찾기 위해 전전했으나 하는 일마다 실패만 거듭했습니다.
그러던 중 국제화학주식회사 공장 종업원으로 들어가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일을 견디었습니다. 한 푼 두 푼 이를 악물고 저축을 시작했습니다. 2년간 저축 생활 끝에 나는 결혼을 했고 철재상회를 차리에 되었던 것입니다.
강철은 망치가 필요하듯이 나의 성공은 그 모든 고통과 냉대가 아니었다면 결코 얻을 수 없었던 것으로 압니다. 이제는 부산진에 어엿한 철재상을 차리고 사장 소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지금 제 과거처럼 아니 그보다 더 고달픔 속에 지내고 계시는 젊은 분! 저 같은 사람도 이렇게 잘 살날이 있는 것입니다.
용기를 내세요. 부모님에게 불만이신 분 부모 원망 마세요. 안 계신 것보다 백 배 천 배 고마운 겁니다. 지금 하시는 일이 고달픈 분 바로 그 직장마저 없어서 쩔쩔매는 사람을 생각하고 견뎌보세요.
그럼 언젠가는 쥐구멍에 볕 들 날이 있을 겁니다.
유행가 말마따나 쨍하고 볕 들 날이 있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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