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회의가 끝나고 나는 부대장 앞으로 끌려갔다. 통역(당시 연희대학교 영문학교수)이 곧 불려왔다.
나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모든 것을 천주님과 성모 마리아께 맡기고 차근차근 설명해나갔다. 내가 강제로 끌려나가서 잠시 괴뢰군 탱크병으로 있었고, 철조망 건너 포로수용소에 친구가 있는 것을 보고 남은 빵과 고기조각을 종이에 싸서 던져주었다는 사실을.
통역을 통해서 내가 얘기 한 것을 다 듣고난 사령관은 나더러 마지막으로 할 말이 더 있으면 하라고 하였다. 나는 잡혀가는 이 마당에 못할 말이 무엇이 있겠는가 결심하고 가슴에 맺혔던 얘기들을 다 털어놨다.
『오늘날 수백만의 한국인들이 먹을 것이 없어 굶주려 쓰러지고 있는 이 때에 미군식당 책임 하사관의 명령에 의하여 깨끗한 음식을 바다에 버리는 것은 인도적으로나 하느님 대전에서나 모두 옳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당신네 미군들만이 크리스찬이 아니고 우리 미천한 식당보이나 하우스보이들도 주일날 미사참례할 의무가 있다』
사령관은 한참동안 주위사람들과 의논을 하고 또한 책임하사관도 불러들여 얘기했는데, 당시 나는 영어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여 그냥 서서 포로수용소로 끌려갈 시간만 기다리며 속으로 열심히 성모님께 기도하고 있었다.
드디어 결정이 내려졌다. 그런데 통역이 말을 하기전에 그의 얼굴에 미소가 떠오르고 있질 않은가! 이 어찌된 일이란 말인가. 전혀 예상외의 결정이 내려졌다.
나는 포로수용소로 끌고가기는 커녕, 앞으로 남은 음식을 버리지 말고 모두 나에게 줘 피난민들에게 나누어주라는 허락이었으며, 또 우리 한국인 종업원들도 주일미사에 동등한 교우의 자격으로 참례할 수 있다는 허락이었다.
너무나 놀라서 내귀를 의심할 수 밖에 없었고 나도 모르게 사람들 앞에서 성호를 긋고 감사의 기도를 바치고는 결국 그들 앞에서 눈물을 보이고야 말았다. 이 기가 막힌 사실들이 모두 천주님과 성모님의 따뜻한 돌보심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하루 12시간의 중노동으로 피로해진 몸을 이끌고 남은 음식을 여러개의 큰 깡통에 담아들고 미군트럭으로 대청동 성당에 밤중에 돌아오면 많은 피난민들이 자지 않고 나를, 아니 내가 갖고오는 음식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보게되는 순간 하루의 모든 피로가 말끔히 가심을 느낄 수 있었으며 하루하루의 중노동이 그렇게도 즐거울 수가 없었다.
1950년 성탄이 지난 후 우리 신학생들은 전부 제주도로 가라는 노 대주교님의 명령으로 나는 미군부대를 사직하고 부산부두에서 L.S.T를타고 제주도로 향하였다.
1951년 서귀포에서 북쪽으로 한라산을 향하여 약 5리정도 떨어져있는 곳에 서흥리(홍로)라는 작은 마을이 있었다. 당시만해도 한라산에는 공비들이 들끓고 가끔 마을로 쳐들어와서 양민들을 학살하고 식량을 탈취하여 가곤하였다.
그래서 당시 제주도의 모든 마을은 돌로 성을 쌓아올려 마치 중세기의 성같은 느낌을 주었다. 우리들은 이마을의 성문을 밤낮을 가리지않고 지키고 있었는데, 1월 어느날 밤에 드디어 공비들의 습격을 받게 되었다.
바로 현 전주교구장이신 박정일 주교님(당시대신학생)이 지키던 성문을 넘어 쳐들어 왔다. 박주교님은 초소에서 미처 나오지도 못하고 숨어있었으나 공비들은 등잔 밑이 어둡다고 그냥 지나쳐 오늘날의 박주교님께서 건재하시고 전주교구를 돌보고 계신 것이다. 이 어찌 은총의 도우심이라 아니할 것인가. 그때 나는 박주교님이 지키던 성문 바로 옆의 문을 지키고 있다가 변을 당했다. 총성과 횃불 등으로 미루어보아 이미 공비들이 쳐들어온 것으로 생각하고 마을에 있는 경찰지서로 달려갔다.
이미 지서장은 모여든 경찰관, 방위군, 민간인들에게 지킬 위치를 정해주고 출동할 것을 명령하고 있었다. 나도 다른 세사람과 함께 죽창을 들고 나갔다.
한참 전진하다보니 같이가던 동료들은 모두 온데간데 없고 나혼자만 죽창을 들고 용감하게(?)가고 있지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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