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기갑병의 기관총이 였다면 공산군이 가르쳐준 사격술을 이용하여 공비들을 자신있게 사살할 수 있으련만 이 죽창(竹槍)만으로 그들과 마주 싸운다는 것은 아무래도 자살행위로 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더구나 혼자서 뭘 어떻게 한단말인가?
『차라리 숨어버리자. 다 숨어 버렸는데 나 혼자서 이 수많은 공비들을 어떻게 대적할 수 있단 말인가. 곧 서귀포에서 지원군이 도착할 것이니 그때까지만이 라도 안전한 곳에 숨어있자』
그러나 막상 숨기로 결정하고 숨을 곳을 찾아보았으나 마땅한 곳이 없었다. 총성은 가까와지고 횃불은 더 밝아지고 있었다.
절대절명이다. 그때 눈앞에 포플러나무가 보였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나무에 오르기 시작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나무밑에는 횃불을 든 공비들이 왔다갔다하고 사방에선 총성과 비명이 들려왔다. 특히 성밖 산에서 밤중에 소리지르는 여자 공비들의 소리는 소름끼치게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평양에서의 그 무서운 폭격, 시가전 그리고 탱크전에서도 살아남은 내가 여기 우리나라 최남단 서귀포(서홍리)까지 피난와서 억울하게 공비들에게 죽게되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억울하고 원통해서 어찌할바를 몰랐다.
포플라나무 꼭대기 가지에 걸터앉아, 아니 매달려서 계속 묵주의 기도를 바치기 시작하였다.『성모마리아여, 여기서 공비에게 살해당하기에는 너무나 억울합니다. 비록 주님과 성모님의 뜻이 그렇다 하더라도 이번만은 어머님의 뜻을 좀 바꾸어 주십시오. 그리고 제발 살려주십시오. 이 세상에서 좀 더 보람있는 일을 하다가 주님 앞에 나갈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십시오』지금 생각해보니 좀 거만한 태도로 기도드린 것 같다. 천주님과 성모님의 뜻을 거슬러서라도 살려주시기를 애원했던 것이다. 목숨이 아깝거나 이 세상에 미련이 남아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다만 너무 억울해서였다.
몇 백번의 묵주기도를 바쳤는지 알수 없었다. 언제 멎었는지 충성도 멎었고 어느덧 먼동이 트기 시작하였다.
이 어찌된 일인가? 나는 내평생 1미터 높이의 나무도 올라가 본적이 없었는데 30미터는 족히 넘을 포플라나무 꼭대기에 그것도 미군부대에서 얻어 신은 크고 무거운 군화를 신은채, 또 손에는 훌륭한(?)무기인 죽창을 꼭 잡은채 올라와 있는 것이 아닌가!
사람이 죽을 위험에 처하게되면 비상한 힘이 생기는 것을 그때 실감하였다.
비로소 살았구나하고 안도의 숨을 쉬자 이제는 거꾸로, 나무에서 도저히 내려갈 용기가나지 않았다. 그뿐아니라 떨어질까봐 무서워 벌벌 떨게 되었다.
그때였다. 이경재 신부님(현 안양 라자로 마을 원장)과 성(成)요셉군이 나무밑을 지나가며 나를 찾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이들을 불러야하는데도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순간 왜 이렇게도 못났는지, 왜 이렇게도 성모님께 못된 장면만 보여줘야 하는지 자신이 죽도록 미웠다.
결국 공비에게 납치되었다고 서귀포경찰서에 정식보고 외었던 나「이병갑ㆍ도리노」는 서귀포 소방서에서 보낸 소방차 사다리로 구조되는 영광(?)을 얻고야 말았다.
대단한 꾸중을 들을 각오를 하고 당시 학장님이셨던 정규만 신부님과 부학장님 한공렬 신부님(후에 광주대교구장 역임, 1973년선종) 앞으로 갔더니 뜻밖에도 따뜻이 안아주며 기뻐하셨다.
그때 나는 가슴이 뭉클하여 천주님과 성모님의 은혜로 살아남게 되었고 미력이나마 그 은혜에 보답하고 이웃에게 나누어 주기위하여 노력하기를굳게 굳게 다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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