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의사의 투절한 애국심과 지극한 효심은 결국 신앙에서 온 것이라 단정할 수 있다.
그가 9세때에 청계동공소에서 프랑스인 홍신부로부터 영세를 하고 이또를 암살하고 만주의 여순(旅順)에 있던 일본의 관동도독부 감옥에서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사형이 집행될 때까지 천주를 믿는 신앙인으로서 추호도 흔들림 없이 최후를 마쳤다.
영세하자 적극적으로 신부님을 따라 전교에 나섰으며 생각과 말과 행위로 믿음에 충실하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그가 지방의 백성들을 못살게 구는 탐관오리를 규탄한 것이나 동학군을 빙자하여 토색질하는 자들을 토벌한 것 등은 모두 다 신앙에서 나온 것이라 하겠으며 중국상해(中國上海)에서 조국에 돌아와 진남포에서 삼흥과 돈의 학교를 설립해서 한동안 육영사업에 힘썼던 것도 재령에서 알게 된 프랑스 신부님의 충고에 순명한 것으로 그의 믿음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안의사는 외국인 신부들이 한국인이 우매하다 하여 얕보거나 멸시하는 것을 정면에서 공박하고 그 부당한 인식과 처우를 하지 않도록 정중하게 건의하는 등 이러저러한 문제로 신부님과 의견의 차와 마찰이 전혀 없지 않았으나 교회의 위계질서를 부인하거나 또는 내놓고 저항하는 무례한 일은 없었다고 한다.
이또에게 총격을 가한후 러시아 군에 의해 끌려가면서도 시종 태연자약하였으며 수차의 확인 끝에 이또가 사망한 것을 알게 된 안 의사는 성호를 그으며 『천주님이여! 마침내 포악한 자는 죽었습니다. 감사합니다』하고 울먹였다고 한다.
이 역사적인 거사에 앞서 먼저 하느님께 성공을 비는 기도를 바쳤으며 그가 이또를 살해한 것은 단순한 살인이 아니라 조선 독립과 동양 평화를 위한 독립 전쟁의 일환으로 한 것에 불과하여 자기의 법적 신분은 엄연히 독립의병의 참모중장이기 때문에 마땅히 포로로서 대우해야 된다고 당당히 주장했는데 이것 또한 두말할 것 없이 굳은 신앙에서 온 자기 확신이라고 하겠다.
재판중에 자기가 신자이며 본명이 도마라고 떳떳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안 의사는 사형직전의 유언에서 자기 장남을 사제로 성소(聖召)토록 희망했으며 한국이 독립이 되면 가톨릭 국가가 되기를 바랐다.
그의 신앙은 단순히 자기중심적인 것이 아니라 보다 거시적이며 全한국적이라 할 수 있는데 그가 서울대교구의 민주교에게 대학의 설립을 강력히 요구한 것을 보아도 그의 안목이 얼마나 넓고 깊었던가를 짐잘할 수 있다. 그때 민주교가 한국민에게 대학교육은 시기상조며 높은 대학교육이 신앙에 백해무익하다는 혹독한 말을 듣고 심히 분기했으며 정식으로 이를 부당하다고 항변하였다.
그러나 안 의사는 사제의 생각과 행동이 잘못되고 편협하다 하여 가톨릭 자체를 부인하거나 그 진리를 의심하는 우를 범하지 않았다. 따라서 안 의사야말로 사회참여와 애국운동, 독립투쟁, 교회활동 특히 평신도 사도직의 선구자로서 우리 모두에게 훌륭한 교훈과 모범을 보여주었다고 할 것이다.
안중근 의사의 의거는 단순한 애국적 충동에서 결행된 것이 아니라 철저한 신앙을 바탕으로 거사의 동기ㆍ준비ㆍ과정ㆍ 결과에 이르기까지 너무나도 완벽한 투쟁이라고 보아야 하겠다.
이 거사가 단순한 살인이 아니라 2천만 동포와 동양 평화를 위한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 조화를 이루고 나아가 피압박 식민지 민족에게 실의와 좌절을 딛고 일어서는 새희망과 용기를 불러일으킨 용기있는 덕행(德行)으로 승화시켜야 할 것이다.
그가 의병장으로 경흥전투에서 많은 동지의 만류와 비난에도 불구하고 일본 군대의 포로를 석방해 준 것이나 자기 한 몸을 희생하여 전체 동포를 구원하겠다는 투철한 희생정신과 사랑의 실천은 바로 크리스찬 정신의 발로가 아니고 무엇인가?
그런데 왜 한국 가톨릭에서는 안 의사의 의거와 순국에 대하여 지금까지 미온적이고 소극적인 평가를 했을까?
이 사건이 일어났던 시점에서 조선교구는 일제의 추궁이 두려워 주교가 안의사의 신자 여부를 확인하는 물음에 부정적으로 답하였으며 살인이 어떤 이유로도 천주교의 교리상 용납될 수 없다는 묘한 입장을 취했는데 이것은 심히 유감된 일이 아닐 수 없다.
당시의 국제 정치상 열강의 비위를 맞추어야 할 이유가 무엇이엇든 나라 잃은 백성이 신앙적 확신에 의해 민족의 원수를 제거한 독립투쟁을 단순 살인으로 잘못 평가 했다는 사실은 도저히 납득가지 않는 일이다.
그렇게 고인이 염원하던 민족이 해방이 되고, 분단상태에서나마 독립정부가 선 오늘에 있어서도 그분의 추모행사가 남산 기념관에서 수백명의 관심 있는 사람들과 엉성한 의전 절차에 의해 쓸쓸하게 지내지고 있는 현실을 보고 우리 정부의 무성의를 규탄하면서 안의사의 유가족이나 특히 안중근 의사의 그 장한 정신을 추앙하기 위해 만든 일본인 단체대표로 참석한 일본국 변호사 鹿野琢見 등 일행에게 한국인으로서 억제할 수 없는 수치심과 창피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을을 솔직하게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더우기 한국 가톨릭에서는 해방 이후 오랜 침묵을 깨고 지난 1979년 안 의사 탄신 1백주년과 1980년 그분의 순국 70주기를 기념하는 특별미사를 드린 후 또 다시 아무런 이유없이 중단되여 가슴 아팠으나 금년 들어 지난 3년 26일 오후 6시 30분 명동성당에서 순국 76주기 기념미사를 봉헌하게 된 것을 천주교를 믿는 한 사람으로 무척 다행스럽게 느꼈다.
나라가 어지러울 때 일수록 안중근 의사와 같은 절세의 애국자가 우리 마음 속에 왜 이렇게 사무치게 그리워질까? 아무런 죄없이 십자가에 매달려 죽음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기억하고 그 고통에 동참해야 하는 우리는 살신성인의 그 뜨거운 신앙과 위대한 순국정신을 옷깃을 여미고 다시 한번 생각하는 것도 큰 의미가 있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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