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5일은「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도정학자 기념일」이다. 예수의 데레사 성녀는 우리에게「아빌라」성녀 데레사 또는 성녀 대 데레사로 더 잘 알려져있다. 성녀 소화(小花) 데레사와 곧잘 비교되기도 하는 예수의 성녀 데레사는 16세기 중반 종교개혁의 여파로 이단자들이 속출하고 교회가 부패해 있들 때 완전한 기도와 고행의 개혁수도회를 창설. 교회 쇄신의 전기를 마련하는 한편 끊임없는 묵상기도를 통해 신비학의 신기원을 이룩했다.…⊙
16세기 종교개혁 이후 가톨릭교회 내의 쇄신운동을 펼친 분들은 당시 성인들이었고 그중에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의 공적이 컸다.
성녀의 교회사적 공헌은 첫째 당시 수도원의 극기 생활이 등한시되고 있을 때 주변의 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가르멜 수녀원을 「완전한 가난」이라는 원래의 엄격한 수녀원으로 개혁한 것이다.
둘째로 성녀는 많은 영적 저술을 남겼다. 성녀의 관상기도와 신비신학은 17세기 프랑스 신비학의 근간이 될만큼 교회쇄신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성녀는 끊임없는 속죄의 기도생활을 강조했다. 그래서 이나시오 로욜라 성인이나 필립 에리 성인과 같이 가톨릭교회 내부의 쇄신에 성공함으로써 반가톨릭적 종교개혁을 극복할 수 있었다.
예수의 성녀 데레사는 1515년 3월 28일 스페인의 중부도시「아빌라」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돈 알폰소산체스 데 세뻬다는 두번 결혼했는데 처음 결혼한 부인과의 사이에서 3남매를 낳고 부인과 사별, 성녀의 어머니인 도냐 베아트리즈 다빌라 아후마다와 두번째 결혼, 9남매 가운데 3번째로 태어났다.
성녀의 부모는 지체 높은 가문 출신이고 유복한 신분이기는 했으나 그리 부자는 아니었다.
성녀의 부모는 천성이 착하고 겸손하여 성녀를 포함한 자녀들도 부모의 표양을 모두 열심한 모범적인 신앙가정이었다.
이같이 신앙심 깊은 부모밑에서 자란 성녀는『나를 제외하고는 하느님의 자비로 모두 덕을 닦는 점에 있어서 부모님을 닮았었다』고 형제들의 신앙심을 고백할 정도로 12형제 모두가 신앙심이 돈독했다.
성녀는 14세때 사랑하는 모친을 여위었으나 비탄에 잠겨있으면서도 성모상 앞에 가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면서 성모님이 어머니를 대신해 주도록 간절히 바랄 정도의 신앙심을 소유하고 있었다.
어머니를 여윈 성녀는 17세때 「아빌라」시성밖에 있는 아우구스띠노 수녀회가 운영하는 기숙사에서 생활하면서 신앙과 덕성안에 사는 즐거움을 맛보았으나 오랫동안 주님의 부르심에 귀기울이지 않았다.
성녀는 18세쯤 되었을때 아직도 수도생활을 하겠다는 결심은 하지못햇으나 그 신분이 가장 좋고 제일 확실한 것임을 깨닫고 수도생활을 하려고 자신을 억제하며 차츰 결심하게 됐다.
그러나 이 싸움은 석달쯤 계속되었다. 성녀는 그때의 갈등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수도생활의 괴로움과 번민은 제아무리 크다한들 연옥만은 못할 것이다. 나는 기왕에 지옥가게 마련이었던 위인이 아닌가. 그러니 남은 생애를 연옥같은 곳에서 지낸들 그리 대단스러울 것이 있겠는가. 더구나 그 다음에는 곧장 천국에 갈테니 말이다. 이것이 내 소망의 전부였습니다. 나로 하여금 수도생활에 들어가도록 결심케 한 것은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라기 보다는 노예적 두려움이었다고 생각됩니다』
1543년 12월 24일 부친의 사망은 성녀에게 큰 충격을 주어 자신의 미온적인 수도생활을 청산하려는 노력이 싹트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10년동안 성녀는 계속 양립시킬 수 없는 것을 양립시켜 보려는 헛된 노력으로 해서 마음의 평화를 가지지 못했다.
이러한 갈등 속에서 성녀는 1553년 수녀가 된지 17년만인 어느날 기도소에 들어가니 수녀원에서 어떤 축일을 지내려고 가져다 놓은 성상(聖像)이 그날을 기다리며 놓여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그것은 상처투성이인 그리스도를 표상한 것이었는에 우리를 위해 곤욕을 참아 견디신 주님의 너무도 잘 나타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본 나는 내 넋의 맨 밑바닥부터 뒤흔들릴듯한 강렬하고 경건한 열정을 느꼈습니다』이를 계기로 그녀를 엄습, 하느님과 그녀와의 사이에는 형언할 수 없는 신비적인 굳은 결합이 이루어졌으며 그녀는 하느님의 깊은 감동안에 잠겨 곧잘 탈혼상태에 빠졌다.
우리가 다시 일에 완전한 하느님의 사랑에 이르지 못함을 체험한 그녀는 비유로써 완전한 묵상기도에 도달하는 네단계를 정원에 물을 주는 방법 네가지로 설명한다.
『첫째는 팔의 힘으로 우물에서 물을 긷는 것인데 이것은 우리에게 퍽 힘겨운 일입니다. 둘째로는 두레박
을 단 도르래를 손잡이로 돌리면서 긷는것인데 때때로 그렇게 물을 길어보았더니 힘이 덜들고 훨씬더 많은 물을 길을수 있습니다. 셋째로는 시내나 도랑에서 물을 끄는 것입다. 그렇게 하면 땅은 한층더 관개가 잘되어 축축하게 적셔지고 그렇게 자주물을 줄 필요도 없으니 전원사의 일은 훨씬 줄어듭니다. 끝으로 대량의 비가 내리는 것인에 이 경우는 우리의 힘든 일은 아예 없이 주님께 물을 주시는 것입이다. 그리고 이 방법은 앞서말한 다른 방법들과는 견줄 수도 없을 만큼 뛰어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수난상을 보면서 회심을 한 그녀는 끊임없는 묵상기도를 통해 탈혼과 환시를 경험하면서 1562년 초기 가르멜회의 엄격성을 부활시킨 개혁가로「맨발의 가르멜수녀회」를 창설하고 1568년에는 십자가의 성 요한과의 만남을 통해 「맨발의 가르멜남자수도회」를 창설하는 등 20년동안 스페인 전역을 여행하면서 17개의 남녀수도원을 설립했다.
그녀는 개혁가와 조직가로서 뿐만아니라 영성작가로서 큰 업적을 남겼는데 그녀의 생애는 깊은 묵상생활이 현실적인 활동과 양립할 수 있음을 보여준 고전적이고도 실증적인 예수로 평가받고 있다. 1582년 10월 4일 아씨시의 성프란치스꼬 축일에 67세를 일기로 생애를 마쳤으며 사후 32년만인 1614년 시복되고 1622년 시성됐으며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교회로부터「교회박사」라는 칭호를 부여받았다.
그녀는 자서전「천주 자비의 글」을 비롯「영혼의 성」「계율」「창립자」「수녀를 위한 지침서」등 유명한 저서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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