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부님! 빨리 완쾌되셔서 일 많이 하셔야지요.』
『이제는 다 틀렸어요. 이 나무 둥지처럼 되어버린 육신으로는…』
전신 신경마비로 혀까지 굳어 잘 되지 않는 말로 더듬거리며 남기신 마지막 말씀! 북한 4년 6개월 강제노동에서도 이역(異域)의 양들 위해 끈질기게 지키신 목숨이 애완동물(고양이)의 이빨에 이렇게 허무하게 가시다니-.
1963년 6월 11일 밤 P병원 205호실. 경도범(景道範) 신부님! 삶의 멍에 벗으시고 자색 제의로 갈아입으시고는 영생을 사시려고 떠나가셨다. 밤 새워 그분 죽음 앞에서 울음 잊은 무딘 사내는 그분 생시의 자취를 곱씹어 보았다.
『신부님 식사 준비 다 되었습니다.』주방 아이의 소리가 떨어지자마자 동시에 타이핑 소리가 끝나고 주방으로 들어가신다. 그 동작은 기계 이상으로 정확하여 단 한 번의 예외도 없다. 어쩜 하던 일을 그렇게 명확하게 중단할 수 있을까? 독일 기계처럼 정밀하고 능률적이다.『신부님 이것이 혹은 저것이 필요합니다』. 부탁이 있자마자 열중하던 일을 즉각 중지하시고는 곧 응하신다.
그 날렵하고도 정확한 행동은「곰의 후손」인 내겐 신기하기 짝이 없었다 우리 습성과는 너무도 동떨어지기 때문이다.
시집간 누나가 어쩌다 친정엘 오면 어머님과 그 무슨 얘기가 그리도 많은지 도란도란 꼬박 밤을 지새고는 아침이면 퉁퉁 부은 눈으로 선하품을 하며 조반마저 설친다. 야유회나 단체놀이 혹은 개인 휴식 때도 우리는 마찬가지이다. 레크레이션이란 서구적 휴식이 우리에게 있어서는「재창조」란 합리적 계산을 가진 것이 못 된다. 그저 곰 새끼의 휴식 마냥 실컷 만끽된 잠의 하품 다음에야 새것을 찾아 어슬렁어슬렁 헤매는 그런 꼴이다. 도대체「절제」라는 말부터가 우리 생리에 생소하다.
엄마들의 수유 방식에서부터 우리는「절제」나「시간 약속」따위를 몸에 익힌 바 없다. 필요에 따라 울기만 하면 다 된 것이다.
이런 생리 속에서 살아온 내게 있어서 그분과의 생활은「정확ㆍ신속ㆍ절제」라는 몸에 맞지 않는 새 생활 습성을 익힐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아직도 이「곰의 후손」은 자유분방하던 산야의 생활에 향수마저 느끼고 새 것을 생리화할 수 없으니 고인(故人)에게 미안하다.
이제 일밖에 모르시던 노사제는 두 손을 합창하고 쉬신다. 은인들께 보내는 수천 통의 편지를 저 고양이 독이 퍼져 끝마디가 검푸르게 변한 열 손가락이 쉴 짬 없이 타이핑하시었다. 그러고도 늘『야이야, 할 일 너무 많아 걱정이요』파이프 담배를 빽빽 연신 빠시며 일손을 계속 하신 채 중얼대시었다.
사실 일이 너무 많았다. 3천이 넘는 신자에 공소가 18개소 성사 집행 새 성당 신축공사 나환자 정착장 사업, 새 공소 건립 등등. 거의 초인적인 힘으로 격무를 처리하셨다. 그리고도 일, 일, 일밖에 모르셨다.
이 글을 쓰는 것은 한 외국 사제의 죽음을 단순히 추념하기 위해서 쓰는 것만은 아니다. 이 땅에 복음의 씨를 뿌리기 위해 헌신하는 외국인 사제의 노고가 우리에게 어떻게 수용되는가를 더 말하고 싶은 것이다.
복음을 선포한다는 대의(大義)에 있어서는 이방인과 방인의 차이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선포 과정에서 아무래도 개성이 배제될 수 없으므로 이질적인 요소만큼 서로 동화될 때까지 마찰이 있기 마련이다. 그것도 공동 문화권 밖에 있는 외국 사제인 경우 더더욱 그런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이 떠난 다음, 납득되지 않았던 장점들이 우리를 반성케 하는 것이다. 이런 것들이 누적된 역사 속에 우리를「가톨릭(普便性)」으로 만드는 것일까?
이미 그분은 지상 생명을 마치셨으나 그의 유택(幽宅)으로 남아 있는 수많은 건물들이 S군 산골 산골짜기마다 자리하고 있어 석양에 울리는 종소리를 듣노라면 마음 있는 이를 감회케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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