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리외방전교회의 한국 진출과 관련, 그 배경과 의의에 관한 연구는 비교적 많았지만 당시 프랑스의 국가와 교회의 관계를 배경으로 그 의의를 찾아보려한 연구는 거의 없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외방전교회의 한국진출을 전후한 시기는 프랑스에서 큰 정변이 잇달아 일어난 때엿고 교회는 싫든 좋든간에 이러한 정치적 변동과 보조를 같이 할 수 밖에 없었던 때였다.
그러므로 외방전교회의 한국진출 배경과 의의는 당시의 복잡했던 국가와 교회의 관계에서도 새롭게 이해되고 파악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1. 진출의 政敎관계적 배경
프랑스 혁명이 교회에 끼친 가장 큰 타격은 혁명정부의 非가톨릭化 내지 非그리스도교化 정책이었다. 이러한 정책의 일환으로 교회재산이 국유화되고 수도회와 기타 단체가 해산당했으며 성직자 공민헌장이 선포되고 모든 성직자에게 선서가 강요됐다.
이러한 혁명의 와중에서 빠리외방전교회도 다른 종교단체와 운명을 같이 할 수 밖에 없었는데, 신학교와 재산이 모두 목수됐고 지도자들은 선서를 거부함으로써 해외로 망명하거나 국내에서 숨어 살아야 했다.
그러나 프랑스 국민대중은 여전히 정통종교에 애착을 갖고 있었고 나뽈레옹은 정치적 고려에서 국민의 이와같은 감정에 법적인 성격을 부여하려 했다.
여기서 1801년 교황 삐오 7세와 나폴레옹 사이에 정교조약이 성립됐고 이로 인해 교회와 국가간에 화해가 이뤄질 수 있었다. 이는 가톨릭교를 프랑스 국민 대다수의 종교로 인정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곧 교황을 배신하고 교회를 국가에 종속시키고자 이른바 구속조항(Articles Organiques)을 일방적으로 선포했다. 이로인해 프랑스에서는 갈리키니즘(Gallicanism:교황권제한운동)적인 교회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나폴레옹은 국가이익을 위해 선교단체를 부활시키는데 어느정도 긍정적이었음에도 불구,당시 세 선교단체인 빠리외방전교회, 라자리스트회, 성령선교회를 하나로 통합하려 했다.
이에 빠리외방전교회는 교황이 나폴레옹의 대관식을 위해「빠리」를 방문한 기회에 선교회 재건운동을 추진시켰으며 교황은 이를 나폴레옹에게 건의하게 됐다. 마침내 나폴레옹은 1805년 3월 21일 교황에게 긍정적인 회답을 보냈고 2일 후엔 빠리외방전교회와 성령선교회의 재건을 政令으로 인정했다.
그러나 곧이어 나폴레옹은 교황령을 프랑스에 병합시키려 했고 교황이 이에 맞서게되자「로마」를 점령하고 교황을 납치, 감금시켰다. 그리고 1809년 9월 26일 위의 세선교단체의 통합을 재주장, 재건령을 취소했다.
나폴레옹 이후 루이 18세는 1817년에 종래의 정교조약을 경신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그러나 국왕은 국가를 교회에 봉사시키려 했으므로 수도회나 종교 단체들이 쉽게 재건될 수 있었다. 빠리 외방전교회도 1815년 3월 2일자로 재건됐으며 1823년에는 국왕의 公靑를 통해 정부의 공인단체까지 됐다.
또한 1822년 과격왕당파가 집권하고 이어 교회에 호의적인 샤를르 10세가 즉위하면서 대교회정책은 더욱 호의적이 됐다. 이 무렵부터 교회는 국가의 물심양면의 원조에 힘입어 신앙부흥을 폭넓게 추진해 나갔다.
그러나 7월 혁명(1830~48년)으로 가톨릭은 다시 국교로서의 특권을 잃고 큰 타격을 받았다.
교회는 다시 나폴레옹 시대의 종속관계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러던중 루이 필립정부는 아편전쟁에서 영국이 중국으로부터 이권을 얻어내자 라그르네(de Lagrenee)를 전권대사로하는 소규모 외교사 절단을 중국에 파견,1844년 황보조약체결에 성공했다. 이 조약은 프랑스선교사들을 외교권의 보호하에 둠으로써 종교보호의 기원이 됐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게됐다.
2.진출의 의의
1827년 빠리외방전교회는 포교성성으로부터 조선포교지를 맡아줄 것을 제의받았지만 자금 및 선교사부족 등을 이유로 오랫동안 주저했다. 이때는 빠리외방전교회가 간신히 재기하기 시작한 때였으나 7월혁명으로 그 재기마저 중단될 위기에 놓였던 시기였다.
이 시기에 외방전교회 신학교에서 서품된 사제는 거의 없었는데 한국에 진출한 선교사들은 모두 교구에서 서품을 받고 외방전교회에 입회한 사람들이었다. 당시 프랑스 신학교들은 국가보조도 없고 또 종교교육에 대한 국가의 적의때문에 교육기간을 단축시킬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19세기 초에 우세했던 反知性主的 낭만주의의분위기는 이러한 분위기를 더욱 심화시켰다. 반면 이 시기의 성직자들에게 있어서 놀라운 것은 그들의 勇壯함과 聖性이었다. 이러한 특성은 브뤼기에르 주교가 3년에 걸친 입국길에서 순직했고, 3명의 선교사가 순교했던 점에서 잘 보여지고 있다.프랑스 정부의 포교지에서의 종교보호는 프랑스의 오랜 전통이며 변함없는 정책이었다. 중국에서와 마찬가지로 프랑스는 처음에는 무력을 통해, 다음은 조약의 체결과 외교관의 도움을 통해 보호했고 실제로 보호하는데 성공했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