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실히 예수 그리스도나 소크라테스는 죽음으로서 영원히 살게 된 것입니다.
구차스럽게 사는 것은 차라리 죽는 것만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아니 죽음은 보다 큰 생명을 잉태한 것입니다. 그로부터 그리스도의 사랑은 살기 시작하였고 소크라테스의 다이모니은은 활기를 찾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아이러니가 아무에게나 다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연전에 노벨 수상 작가인 가와바다(川端康成)가 자살을 했습니다. 이유는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히 그리스도나 소크라테스의 죽음과 같은 의미로 받아들여지지는 아니했습니다. 일본 사람들은 걸핏하면 자살로서 책임을 회피하는 것을 깨끗하다고 표현하고 그것을 미덕으로 여기고 있습니다만 그러한 행위가 어디서나 호의적으로 받아지리라는 보장은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분명히 해두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삶도 죽음도 사랑 안에서 하나라는 사실이며 삶은 죽음을 장식하고 죽음은 삶을 가치 지우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사랑이 일치라고 하는 주장은 동정(同情)과 사랑의 관계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흔히 동정을 사랑과 별개의 것으로 생각하는 버릇이 많이 있지만 사랑이 없는 동정은 없는 것입니다.
『동정은 하지만 사랑할 수는 없다』고 하는 말은 옳은 말이 아닙니다. 동정하는 것은 바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동종보다 넓은 개념인 것입니다.
동정(同情)의 본뜻은 정(情)을 같이 한다는 것입니다. 영어로는 동정을 심퍼씨(Sympathy)라고 합니다. 이 심퍼씨란 동일하다는 의미(sym=syn)와 슬픔 또는 비애(悲哀)란 말 파도스(pathos)가 합하여 이루어진 말입니다. 독일어도 동정은 밋트라이드(mitleid)라고 하는데 이것도 함께 더불어란 의미(mit)와 슬픔(leid)이 합쳐 된 말입니다. 그렇다면 서양 말의 동정이란 일차적으로 슬픔을 같이 함을 뜻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우리가 일상 쓰고 있는 이 동정은 기쁜 또는 즐거운 상태에서 갖게 되는 감정이라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슬프고 빈약한 상태에서 발로되는 감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동정의 대상은 항상 자기보다 슬프고 약한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물질적인 상태에 있어서 부자는 가난뱅이를 동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난뱅이가 부자를 동정한다고 하는 것은 좀처럼 승인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가난뱅이는 가난하기 때문에 부자의 동정의 대상은 될 수 있을지언정 동정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정신적으로 부자이고 물질적으로 가난한 사람이 물질적으로 부자이면서 정신적으로는 가난하다면 거기에는 상호간의 동정이 성립될 수 있을 것입니다. 디오게네스가 알렉산더 대왕을 동정한 것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며 알렉산더 대왕이 디오게네스를 동정한 것은 정신적인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무릇 동정한다 함은 결국 위에서 아래로의 사랑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위의 상태에서 아래 상태의 연민, 고뇌, 고충, 아픔, 슬픔, 괴로움을 나누어 가지며 함께 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보다 인간적인 가치를 갖게 되는 것은 이 동정이 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이세상이 보다 따뜻하고 인정 있고 외롭지 않는 것은 이 동정이 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결국 동정은 감정의 일치를 뜻하며 사랑은 일치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동정도 정(情)에서 비롯하는 것입니다. 고래로 동양사상 가운데는 이 정을 일곱 가지로 묶음하고 있습니다. 그 일곱 가지 정이란 희(喜)노(怒)애(哀)낙(樂)애(愛)오(惡)욕(慾)이 그것입니다. 희는 기뻐하는 것이요 노는 성내는 것이며 애(哀)는 슬픔이요 낙은 즐거움이요 애(愛)는 좋아함이요 오는 싫어함이요 욕은 하고자 함입니다.
이러한 일곱 가지 감정이 바로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감정의 전부인 것이니 동정한다 함은 이러한 일곱 가지 감정의 상태 중의 어느 하나의 감정에서 비롯하거나 또는 이들 감정의 몇 가지의 복합적인 작용에서 생겨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칠정과 함께 동정을 생각할 때는 비단 슬픔과 빈약의 상태에 대한 동정으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자세로 기쁨과 즐거움과 좋아함의 상태까지 함께 공유함으로써 더욱 기쁘고 더욱 즐겁고 더욱 좋아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동정은 위에서 아래로의 사랑의 원리에서 시작하여 옆으로 좌우로 공유하는 즐거움에까지 이르는 것입니다.
거룩한 어머님의 사랑은 그 연약한 어린이에 대한 하향적 동정뿐 아니라 천진난만하게 웃어대는 어린 양의 미소 속에서 자기의 그 숱한 고뇌를 잊는 감정적 공유로 하여 더 거룩함을 보게 됩니다.
사랑이 동정이고 동정이 감정을 함께 하는 것이라면 미움은 감정을 다르게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정을 다르게 가지면 동정이 아닙니다. 슬픈 분위기에 기쁨을 가지거나 즐거운 분위기에서 슬픈 표정을 짓는 것은 동정적인 행위라고 할 수 없습니다.
서양 말로는 동정이란 말이 하향적인 행위로서 즉위의 상태에서 아래 상태에의 일치를 나타내는 것이었으나 우리말에서는 평등적 의미에서 공유적 감정이라고 해석되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동서양의 묘한 의미 차를 보게 됩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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