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제1차 바티칸 공의회는「긍정적 방법」으로 하느님을 영원한 분이라고 가르치기도 합니다. 이 진리는 집회서(18, 1) 다니엘서(6, 27) 시편 (102, 26~27) 등 성서 여러 곳에 나옵니다. 히브리서(1, 10~12)는 시편 말씀을 다시 취합니다.「하늘과 땅은 없어질지라도 주님은 영원히 계십니다.…만물은 옷처럼 변할지라도 주님은 언제나 같으시고 주님은 영원히 늙지 않으십니다.」
여기서 영원은 본질적으로 하느님을 세상과 구별시키는 요소입니다. 후자가 변화에 예속되고 사라져 없어지는 반면에 하느님은 세상의 지나감을 넘어서 머무십니다. 그분은 필연이시고 변화될 수 없습니다.
「주님은 같으십니다…」
영원하신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의식하고 성 바오로는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영원한 왕이시며 오직 한분뿐이시고 눈으로 볼 수 없는 불멸의 하느님께서 영원 무궁토록 영예와 영광을 받으시기를 빕니다. 아멘.』(1디모테오1, 17)묵시록에는 같은 진리가 달리 표현되어 있습니다.『지금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전능하신 주 하느님께서「나는 알파요 오메가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1, 8).
6. 묵시록의 이러한 사실들 속에는 하느님이 자립존재이며 따라서 필연적이고 그 때문에 영원하며 그분이 있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그분은 시작이나 마침도 있을 수 없고 그분의 유일하고 무한한 존재행위 안에는 순간들의 연속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할 때 이르게 되는 이성적 확신도 표현되어 있습니다. 올바른 이성과 계시가 이점에 놀랍게 합치됩니다.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존재의 절대적 충만(ipsum Esse subsistens)이시기 때문에「존재의 면에서 쓰여진」그분의 영원성은「나누어질 수 없고 완전하며 끝없는 생명의 동시적 소유」로서, 따라서 절대적으로「시간을 초월하는」존재의 속성으로서 이해돼야 합니다.
하느님의 영원성은 창조된 세상의 시간과 더불어 지나가지 않습니다.「그것은 현재와 일치하지 않습니다.」그것은 현재를 앞서거나 현재를 무한으로「연장시키지」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있는 것」을 넘어서 그리고 그 위에 있습니다. 영원성은 하느님의 그 모든 신비와 더불어 어떤 식으로 「내재적으로」시간, 변화, 우연성에 예속되어 있는 모든 것, 그 「넘어가는 것」과 그「위에 있는 것」을 포함합니다. 아테네 아레오빠고에서의 성 바오로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우리는 그분 안에서 살아가고 움직이며 우리의 존재를 갖게 됩니다.」(사도행적17, 28)사물을 넘는 하느님의 초월성, 시간을 넘는 영원성을 긍정하기위해「밖으로부터」라는 은유적 표현으로 말합시다. 바로 사물들의 존재에 내재적이고 따라서 순간들의 연속으로 지나가는 시간에도 내재적인「존재」가 하느님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다시 긍정합니다. 그 아무것도 하느님의 영원한 껴안음(포옹) 밖에 있지 않습니다. 1차 바티칸 공의회는 살아계시고 참되시며 영원하신 하느님에 대한 교회의 신앙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영원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존재의 절대적 충만 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성서에서 인용한 본문들이 명백히 지적하듯이 시간과 더불어 변화 하는 존재의 조각들이나「부분들」의 총체로서 이해될 수 없습니다. 존재의 절대적 충만은 영원성으로서만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 자신의 생명인 그 존재의 온전하고 분할할 수 없는 소유로서만 이해될 수 있습니다. 이런 뜻에서 하느님은 영원하십니다.「지금」「현재」자립하시고 불변하시며 존재양식이 「우연적」존재들인 피조물들의 존재양식과 본질적으로 구별됩니다.
7. 그렇기 때문에 자신을 계시하신 살아계신 하느님은 영원한 하느님이십니다. 더 정확하게 하느님은 영원 자체시라고 말합시다. 신적 존재의 완전한 단순성(omnino simplex)은 그런 행태의 표현을 요구합니다. 우리가 인간의 언어로「하느님은 영원하시다」라고 말할 때 우리는 신적존재의 한 속성을 지적합니다. 그리고 어떠한 하느님의 속성도 바로 하느님의 본질과 구체적으로 구별되지 않기 때문에(반면에 인간의 속성들은 그것을 소유하고 있는 인격과 구별되지만)『하느님은 영원하시다』라고 말함으로써 우리는『하느님은 영원이시다』라는 것을 긍정하고자 합니다. 시간과 공간에 예속된 우리로서는 이 영원이 하느님의 본질과 마찬가지로 이해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이러한 양상 하에서도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의 무한한 위대성과 엄위로움을 감지하게 해주는 반면에 우리의 작은 존재와 우리의 모든 행위, 우리 삶의 매순간을 포함하여 참조되고 우연적인 모든 것을 포용하는 이「존재-영원」을 생각할 때 기쁨에 벅차게 됩니다.『그분 안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움직이며 우리의 존재를 갖게 됩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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