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나이 열여덟 되었을 때 부모님의 주선으로 이웃 마을에 사는 김일남이라는 청년에게 시집을 갔습니다.
지리산 줄기가 뻗어 내려오다가 덕유산 밑에 높은 분지를 만들어 놓은 듯한 이 산촌에서 아들 셋 딸 하나를 낳고 평범한 세월을 보내며 살다가 저 몸서리치는 6ㆍ25 사변을 만났습니다.
저는 남편과 함께 공비들의 감시의 눈을 벗어나 피난길에 올랐습니다. 아직 어린 것들을 등에 업고 입은 옷 그대로 공비의 마수를 벗어나자 바로 남편은 기피자 단속에 걸려 전선으로 떠났습니다.
저는 어린 것들을 전주시 중노송동 옛화장터 근처의 외딴집 다니면서 부엌일을 해준 다음 밥과 김치를 얻어 목숨을 이어 왔습니다. 그러다가 전주시청 사회과의 배려로 시립 행려병자 수용소에 수용됐습니다. 이때 전선으로 떠났던 남편이 적이 쏜 박격포탄의 파편에 맞아 두 눈을 잃고 제대되어 돌아왔으나 가족들을 찾지 못하고 헤메이다가 결국 행려병자 수용소에 수용되어 슬픈 재회를 하게 됐습니다. 그러나 오직 만날 수 있는 것만이 우리에겐 기쁨이었습니다.
행려병자 수용소에서 지내는 동안 남편에 자신이 비록 두 눈을 잃었을망정 쓸모없는 존재만은 아니라는 신념을 되찾아 왕골 방석을 만들었으며 이러한 피나는 노력을 다한 끝에 전주시 금암동 ***번지에 내 집을 마련하고 이사를 했습니다. 이때 둘째 아들 영태가 군에 입대하게 됐으며 남편이 소속했던 백마부대에 편입돼서 월남으로 떠나게 됐습니다.
그러나 3개월 뒤 아들은 눈을 잃고 돌아왔습니다. 아버지는 6ㆍ25 때 백마고지에서 아들은 월남의 백마부대에서 눈을 잃은 것입니다. 이 충격으로 남편은 졸도하여 뇌출혈로 죽음의 고비를 헤메는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아들과 저는 불행한 이웃을 위해 남은 생애를 바치겠다는 그리스도의 정신에 따라 서원하였으며 19일 만에 남편은 소생하여 8년을 더 살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남편이 죽은 다음 무엇인가 불행한 이웃을 위해서 일하겠다고 생각하는데 뜻밖에도 정신착란증의 처녀가 집으로 찾아왔으며 아무 데나 똥을 싸고 찍어 먹는 등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소동을 벌렸습니다. 저는 아이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정성을 다해서 돌본 결과 3개월 만에 이 처녀는 정신의 안정을 되찾았습니다. 그 뒤 여기저기서 돌보는 이 없는 정신병자들이 몰려와 저의 집은 미친 사람의 집이 됐습니다.
누가 미치고 누가 성한 사람인지 알 수 없는 상태가 되자 이웃집에서부터 심한 반발을 사게 됐으며 남편의 옛 전우요 집단촌의 회장이기도 한모씨로부터 추방을 받게 됐습니다.
결국 마을에서 쫓겨나지 않으려고 이들 정신환자들을 내어 보내려 했으나 부모들마저 외면하는 이들을 버리지 못하고 살던 집을 헐값으로 팔아넘긴 뒤 허허벌판의 300평의 땅에 29평의 큰 집을 짓게 되고 이들 불우한 환자들과 함께 이사를 했습니다. 이해 못하는 사람들은 갖가지로 구구한 억측을 하지만 지금까지 누구의 도움 없이 오직 숨은 봉사자로서 최선을 다하여 버림받은 영혼들을 위해 일할 뿐입니다. 좋아서이든지 싫어서이든지 북극의 백야를 헤메이는 이들 정신환자들을 위하여 이 목숨 다할 때까지 몸을 바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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