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말씀이 기록된 것이 성경이고 기록되지 않고 입으로 전해 내려오는 하느님의 말씀을 성전이라고 한다. 성경과 성전의 그 원천적인 말씀의 바탕이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그 권위로보나 그 내용으로 보아서 두 가지 모두 하느님의 가르침이라는 점에서 동일한 위치에 있다.
성전의 기원은 하느님
성전은 전설이 아니다. 교회에도 전설이 없지 않지만 그 전설의 기원은 인간이고 성전의 기원은 하느님이다.
기록 되지 않고 교회 전통 안에 내려오는 성전의 내용은 성서에서 그것이 증명된다. 구약의 경우를 먼저 살펴보기로 한다. 5경을 쓴 모세도 그 다섯가지 성경을 쓰는 즉시 계시를 받은 것이 아니고 입에서 입으로 내려오는 계시의 말씀을 기록했다, 기록하기 전에는 성전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모세는 5경 마지막 경인 신명기에서 그의 가르침이 모두 기록될 수 없었다는 것을 암시하면서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선조 대대로 지나온 세월을 더듬어 보아라. 너희 아비에서 물어 보아라 그가 가르쳐 주리라. 노인들에게 물어보아라. 그들이 일러 주리라』(신명기 32, 7)
여기서 아비들이 그리고 노인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즉흥적으로 일러주는 것이 아니고 옛부터 내려오는 하느님의 말씀이 있다는 뜻이다, 시편에서도 『하느님 우리는 두 귀로 들었읍니다. 우리 선조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었읍니다, 선조들이 살던 시대 그 옛날에 당신께서 하신 일들을 전해 들었읍니다 』(시편 44, 1)
이렇게 보면 구약시대에도 성경 외에 계시의 진리가 전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예수 승천 수십 년 후 신약 집필
신약의 경우를 보기로 한다.
신약성서가 성립되는 과정에 있어서 특히 4복음의 경우 처음부터 예수님의 가르침을 직접받아 쓴 것이 아니었다. 예수님도 기록하라는 명령을 하지 않았다, 도리어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서 『너희는 온 세상을 두루 다니며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선포하라 』 (마르코16, 15). 이렇게 이미 가르침을 받은 것을 선포하라고 하셨다, 선포해야할 그 복음은 그 당시에 기록되어진 내용이 아니고 예수님으로부터 구전으로 들은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이 기록된 것이 복음인데 그 기록 연대를 볼 것 같으면 제일 먼저 쓰여진 마태오 복음 또는 마르코 복음이 기원 60년에서 70년 사이라고 한다면 예수님이 승천하신 다음 적어도 20년 30년 후에 기록된 것이 드러난다.
그렇다면 오늘의 복음 성경은 먼저 예수님의 가르침을 귀로 직접 듣고 그것을 입으로 전해진 사실을 몇 십년 후에야 성경화 된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보다 먼저 기록되지 않고 있었던 하느님의 말씀이었던 성전이 먼저 있었고 오늘의 성경의 근원은 성전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리고 예수께서 33년 지상생활의 모든 것이 4복음에 모조리 기록되어 있다고도 할 수 없다. 기록된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 중에서 극히 부분적인 것 밖에 될 수 없다, 그래서 4복음의 마지막 기록자인 요한은 자기복음의 결론을 이렇게 내렸다.
『예수께서는 이밖에도 여러 가지 일을 하셨다. 그 하신 일들을 낱낱이다 기록하자면 기록된 책은 이 세상을 가득히 채우고도 남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요한복음 마지막 성서구절)
이 얼마나 확실하고 정확한 말인가?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성서에 기록되지 않은 것도 너무나 많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아도 예수님의 말씀이 4복음에 다 기록되어있다고 생각할 수 없다. 그러니 성서이외에도 더 풍부한 하느님의 말씀이 있다. 이것을 성전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더 자세하고 확실한 구원의 진리를 터득하기위해서는 성경 못지 않게 성전의 내용을 공부해야한다.
사도 요한은 그의 서간에서 밝혔다.
『그대에게 할 말이 많지만 펜과 잉크로 써 보내고 싶지는 않습니다. 나는 멀지 않아 그대와 만나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때에 우리는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를 나누게 될 것입니다』(요한3서1, 13~14)
聖傅의 중요성 인식해야
사도들도 불가피한 경우에 편지를 이용한 것이었지 가능하면 서로 만나서 입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기를 원했었다. 그러니 기록된 성경보다도 기록되지 않은 가르침의 중요성을 알아야 한다.
어떤 교파에서처럼,「성서 제일주의」로 치닫고 있으면서 성서에 없는 것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식의 정신은 진정 그리스도교의 진수를 알 수 없는 상황이라 하겠다. 비근한 예를 든다면「성서에 담배를 피우라는 말이 없는데 왜 담배를 피우느냐?」고 어쩌구… 없는 말을 하는 수도 있다.
이렇게 인간매사를 성서에 근거를 둔다면 우리는 하루도 살 수 없다. 성경 어디에 자동차를 타고 다니라는 말이 있으며 성서 어디에 라면을 끓여 먹어라는 말이 있는가. 성서 제일주의 더구나 거기에 성서지유해석까지 붙이면 드디어 루드비그 포이에르바하가 지적했듯이 그리스도교는 사회적인 혼란과 분열만을 조장하는 악한 요소가 될 수 밖에 없다. 성경을 옳게 읽어나가면 성전의 중요성을 알게 되고 성전의 가르침이 무엇인지에 대한 관심이 떠오르게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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