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진리를 설명할 때 우리는 유비(類比)를 사용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인간은 감관(感官)을 통해서만 구체적 인식에 도달할 수 있으므로 초월성을 추상하여 신앙함에 있어 종종 오해가 생기기 마련이다.
어느날 밤. 교리 지도를 위해서 어두운 골목길을 가고 있었다. 마침 앞에 취객 두 명이 지나가고 있었다. 좀 덜 취한 친구가 옆 친구에게『이 사람아 정말 천당이 있을까?』하자 옆 친구『예끼 어리석은 소리. 천당이 어디 있어? 천당은 초만원이라 살기 어렵고 지옥엔 따끈한 방에 불고기 파티가 한창이라네』그 양반 그대로 죽는다면 죽어서도 술과 불고기나 먹고 다니겠지. 아무리 좋아하는 술과 불고기라도 계속 그러고 다닌다면 그제서야 그것이 지옥인 줄 알걸.
옛날 교우들은『천당에 간다』는 말을 쓰는데 자연스러웠다. 그런데 요즈음은『천당에 간다』는 말에 좀 쑥스러움을 느끼는 것 같다. 왜 그럴까? 인간 실존철학이 신학에 영향되었고 그리스도교 사상의 대종(大宗) 미래관이 현실주의와 기능주의의 횡포로 현세관에만 집착하게 하는 시대적인 병을 앓고 있기 때문이리라.
16년 전 E 신부님과 오토바이를 타고 N공소로 가고 있었다.
하필 그곳 읍내가 장날이어서 많은 교우들이 미사를 제쳐 놓고 장보러 가고 있었다. 자기들을 위해서 가는데 그들은 다른 곳으로 가버리니 기분이 좋지 않다. 화가 나신 신부님『저 사람들, 죽어서도 장에만 갈 겁니다』하신다. 내게는 생소한 표현이었기에 농담으로 알고 웃어버렸다. 그만큼 나로서도 천당에 대한 개념을 오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쩜 통속불교가 말하는 극락관과 도가(道家)적인 이상향을 감각적으로만 파악하여 천당이란 개념에 채색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훗날 다시 생각하니 어이없는 일이었다. 천당이 실제로 존재함을 신앙하는 이상, 시간으로 묶어놓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천당이란 영생을 향유하는 곳이므로 소멸을 내포하고 있는 시간 세계에 지배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천당을 시간 속에서 파악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변화를 입지 않는 하나의 상태 안에서 이해함이 옳을 것이다. 지금 바로 이 세상에 천당이 와있는 것이다.
다만 우리의 마음 눈이 깨끗하지 못하여 보지 못할 뿐이다. (마태오 5장 8절 참조). 그렇다고 문학적인 표현인 관념 세계는 더욱 아니다. 사실적이며 실재적인 세계이다. 그것은 사실상 지금 와 있으나 우리의 불완전을 떨쳐버리는 죽음을 통해서만 완전히 고정될 것이다.
그래서 구원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적당히 살다가 죽어 영생을 살러 가리란 생각은 어리석은 것이다. 살아 성인이 아닌 자가 죽어 성인이 되리란 것(천당에 가리란 것)은 기만적인 사고이다.
우리는 제 스스로가 택한 가치 소망에 따라 받는 것이다.
살아 하느님과 합일하지 않은 삶은 죽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이제야『저 사람들 죽어서도 장에만 갈 겁니다』하신 말을 조금 터득한 것 같다. 공허한 소망보다 수덕에 더 힘쓰며 살아야하는 것이다. 십자가상 죽음으로 이루신 구원의 샘물은 우리를 매일 영생으로 세례시키고 있질 않는가! 신앙과 회개를 갖고 달려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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