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I
우리는 다시 사순절을 맞이했습니다. 해마다 생각해보는 것이지만 사순절의 의미는 무엇이겠습니까? 단순히 그리스도의 수난을 묵상하는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그 수난에 실제로 동참(同參)하는 데에 사순절을 맞이하는 참된 정신 자세와 그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수난은 한 번 있었던 역사적 사건입니다. 그러나 그 수난이 지닌 의미와 낳은 효력은 모든 시대에, 모든사람에게 미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수난은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굶주림과 헐벗음은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 속에 병자의 신음 소리에, 옥고를 치르는 수인(囚人)들의 모습 속에, 인간의 모든 비참과 불행, 그 죽음 속에 그리스도는 오늘도 수난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당신과 그들을 하나로 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마태오 25장 31절 이하 참조)
『그분은 몸소 우리의 허약함을 맡아주시고 우리의 병고를 짊어지셨다』(마태오 8ㆍ17 이사야 53ㆍ4)
이는 바로 우리를 위하여 강생하시고 수난하신 그리스도의 참모습입니다. 여기에 우리가 동참할 때에 우리는 진실히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II
오늘날 우리들은 복음을 전하는 데 있어서도 열심하다고 말할 수 없지만 복음을 따라 사는 데에는 더욱 열의가 적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복음을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가난과 겸손 사랑과 봉사를 받는 것이요 그 극치는 형제를 위하여 당신 스스로를 바치신 그분의 고난에 명실공히 참여하는 데 있습니다.
그리스도 신자란 사실 먼저 그리스도와 함께 남을 위하여 죽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야만 그리스도와 함께 살 수 있습니다. (로마 6ㆍ8 요한 12 25 참조)
그런데 바로 이 점이 오늘날 성직자 수도자 평신자를 막론하고 한국 교회 안에 가장 결핍된 정신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뿐더러 우리의 삶은 복음적 가난에 역행하고 이에 대해서 저항마저 느끼고 있습니다. 우리는 겸손도 모르고 사랑과 용서 봉사는 구두선(口頭禪)에 불과합니다. 우리의 삶은 사실 그리스도와 복음서에 동떨어진 것입니다. 이런 판국에 우리가 전하는 복음 말씀이 생명과 구원의 말씀으로 전달될리는 만무합니다. 사순절에 재를 지키며 십자가의 길 기도(성로신공)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수난을 묵상하는 것은 좋은 일이요 또 필요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더 필요하고 더 본질적인 것은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 각자와 그의 몸인 교회 전체에 생생한 것으로 나타나는 데 있습니다.
우리 각자와 전체 교회의 심장 속에는 진정 아픔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주변의 모든 불행한 사람들이 당하는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느낄 만한 아픔이 있어야 하고 그들의 슬픔을 함께 울 줄 아는 슬픔이 있어야 합니다.
어떤 불의와 부정이 이 사회 속에 저질러져도 상관치 않고 그로 말미암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어도 개의치 않는다면 우리는 이미 크리스찬이라 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이른바 종교가 그런 것에 불과하다면 이런 종교야말로「민중의 아편」입니다.
교회는 불의와 부정을 보고 침묵하지 않을 뿐더러 그 불의와 부정, 또는 희생자들의 고통을 자기 것으로 알며 어떤 수난이 있더라도 이들을 구하는 십자가를 대신 질 때에 참으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입니다.
이렇게 우리를 곧 오늘의 교회는 현대의 인류를 구하는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가야 합니다. 이 같은 교회의 모습은 상상만 해도 아름답고 위대합니다.
수난의 가시밭길을 가야 하기 때문에 한편 어둡고 처참합니다. 그지없이 약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빛과 생명과 희망과 기쁨을 가득히 담은 메시아적 교회의 참모습이 여기 있습니다. 이는 바로 수난과 죽음을 넘어서 전 인류를 부활의 승리와 그 영광으로 인도해 가시는 그리스도의 모습니다.
그리스도처럼 벗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바치는 그 사랑에 있습니다. 이 같은 사랑은 실로 세상의 어두움을 밝히는 빛이요 세상에 참된 발전과 평화를 가져다주는 원동력이며 인류 전체를 멸망과 죽음에서 구하는 생명 자체입니다. 왜냐하면 이 사랑이 있는 곳에 하느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III
올해 우리는 이웃과 함께 하는 교회의 삶을 하나의 큰 지표로 삼고 있습니다. 우리의 이웃 가운데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사랑을 필요로 하는 이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는 모두 마음의 문을 열고 이러한 사람들을 형제적 사랑으로 돌보아야 하겠습니다. 가능하면 물질적 도움이 필요한 이에게는 가진 것을 나누어서라도 도와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는 이들과 고통을 함께 하실 뿐 아니라 이들을 위해서 당신 피를 흘리시고 생명까지 바치셨는데 우리가 무엇인들이들과 나누지 못하겠습니까?
『내가 여러분을 사랑했듯이 여러분도 서로 사랑하시오』(요한 13ㆍ34) 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무엇 중에 우리에게 이 사랑의 실천을 가르치고 계십니다. 때문에 본인은 금년 사순절에 즈음하여 한국 주교단이 공동 사목교서를 통해서 여러분 모두에게 권장한 바와 같이 3월 18일 (금요일)에 있을 단식재와 아울러 그 몫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교회에 헌납하는 성금운동에 적극 참여해 주실 것을 이 기회에 다시 한 번 부탁드립니다. 주님의 수난을 기념하는 이 거룩한 계절에 여러분과 여러분 가정에, 우리나라와 온누리에,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의 은총이 가득히 깃들기를 빌어마지 않습니다.
77년 2월 23일 재의 수요일 추기경 김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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