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교회는 재의 수요일로써 40일 간의 재(齋)를 시작한다. 이 기간을 흔히「봉재 40일」이라고도 한다. 이 40일의 유래는 노아시대에 주야간 방황하다가 모세가 하느님의 십계를 받기 위해 주야 40일을 단식했었고, 또 예언자 엘리야가 주야 40일간 단식한 다음에「호렙」산에서 승천했고, 예수가 공생활을 준비하기 위해 광야에서 주야 40일 간의 단식을 했다는 데서 비롯된다. 그래서 이 40이란 숫자는 옛부터 참회ㆍ속죄ㆍ정화(淨化)로써 하느님이 은총을 받는 것으로 전해져 왔다.
교회는 이 40일 간을 거룩한 사순절로 정하고 예수의 부활대축일을 준비시켰다. 특히 여기엔 3가지를 강조했는데 ①예수의 수난과 십자가상의 죽음 ②예비신자들의 세례 준비 기간 ③신자들이 참회와 속죄를 함으로써 참 신자 생활의 성화를 강조했다.
제2차「바티깐」공의회 전까지만 해도 사순절 때는 매수요일마다 대재와 소재를 지켜오다가 공의회 이후부터는 여러 가지 사회생활의 변화로 인해 오늘날에는 사순절 기간 중 단 두 번 즉 재의 수요일과 성 금요일에만 대소재를 지키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초대교회에서 40일 동안 매일 대소재를 지켜왔었음을 상기해야 한다.
흔히 사람들은 이 모든 것을 교회의 성화와 신자들의 성화 그리고 신앙을 북돋아서 개인 성화로만 끝나는 것으로 생각해 왔다. 그런데 예수의 40일 주야 단식을 살펴보자. 예수는 구세주로서 당신의 중대한 사명을 당신 성부께로부터 받았다. 이 중대한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그는 성부의 뜻을 충실히 지켜야만 했기에 광야에 나가 주야 40일을 단식했다. (마테오 4~1) 모세도 하느님의 10계를 받기 위해 시내산에서 (출애 34:28) 이것은 모세도 자기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 즉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느님이 주신 이 계명의 말씀을 충실히 지키고 오직 야훼 하느님 한 분만을 믿는 당신의 백성들이 되게 하였다.
예수는 이 주야 40일의 단식으로써 당신의「죽음의 삶」을 통달했다. 구세주 예수인 자신의 뜻대로가 아니고 오직 성부의 뜻대로 다 이뤄지기 위해 당신 자신이 죽음의 삶 즉 죽어야 됨을 깨달으시고 허기가 지셨으니 또 마귀가 예수의 깨달으심을 꺾기 위해 유혹을 퍼부었으나 (루까 4:3) 예수는 끝까지 마귀의 유혹을 물리치고 마침내 십자가의 정사로써 유혹을 완전히 송두리채 쳐 이겼다. 그리고 죽기까지 성부의 뜻을 따르고 고수한 대가로써 부활의 영광을 누리고 인류를 구속 구원했다.
예수의 이 장렬한 죽음의 모든 계획이 바로 이 40일 주야의 기도와 단식으로써 계획되었고 그 계획대로 당신의 사명을 완수하였다.
이는 당신 자신을 완전히 우리를 위해서 내주신 것이다. 당신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고 당신 성부의 뜻대로, 그리고 우리 죄인들을 위해 당신 생명까지 다 바쳤다. 자기 자신의 영광이나 자기 자신의 성화를 위한 주야 40일의 단식이 아니라 오직 우리를 위한 사랑의 희생이었고 그 사랑의 희생을 주는 것, 즉 우리를 위한 사랑이었다.
오늘에 사는 우리들은 흔히들 전통적인 봉재 40일 즉 사순절 동안 열심히 십자가의 길을 바치고 기도와 미사에 열심히 참예하며 지키라는 몇 번의 대소재와 몇 번의 희생ㆍ극기로써 개개인의 성화를 도모해 왔는데 하루 빨리 이러한 인습에서 탈피해야겠다.
교회가 뜻하는 40일은 장열한 예수의 죽음을 배우고 그 죽으심을 체험하고 예수와 함께 죽어서 예수와 함께 부활의 영광을 갖게 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그래서 우리도 우리 뜻대로 말고 예수의 뜻대로 죽어야 한다. 죽음의 삶을 살아야 한다. 평생을 두고 죽음의 삶을 살아야 하지만 특히 이 사순절에는 예수의 죽음을 체험하는 생활을 해야 하겠다. 그래서 보다 구체적으로 그 죽음의 체험생활을 살펴봐야겠다.
또 우리의 모든 사고방식과 의식구조로 바꿔서 즉 나를 위해서가 아니고 예수를 위해서 볼 수 있는 형제들을 위해서 사는 사고방식과 의식구조로 바꿔 예수가 준 참사랑을 우리도 남에게 줄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죽음을 배우지 않으면 이뤄질 수 없다. 예수와 같이 기도와 단식으로써 죽음을 배워야 한다. 음식을 먹을 때 내 원대로 내 기분대로 먹지 말고 내 욕심과 내 원을 꺾고 먹을 때 얼마만큼 더 내 원을 죽이고 먹는가 거기에서 우리는 죽음을 배운다.
그리고 실지로 배고픔을 체험한다. 그래서 그 체험의 정도와 깊이만큼 우리는 예수의 참사랑을 남에게 줄 수 있다.
담배를 피우는 사람 술을 좋아하는 사람 오락을 즐기는 사람 사치를 즐기는 사람 자기 고집만 주장하는 사람, 자기 자존심 속에서 사는 사람 자기만족 속에 사는 사람 그리고 자기 의무와 권리를 남용하는 사람 게으르고 안일 속에 사는 사람 등, 이 모든 생활에 있어서 죽어서 살 때 즉 자기 원대로 자기 뜻대로 살지 말고 하느님의 뜻대로 죽고 살 때 우리는 비로소 예수의 수난과 십자가상의 정사를 체험하고 그 죽으심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일찌기 영세를 받을 때 이미 예수와 함께 죽었다. 즉 예수의 새 옷을 입은 예수의 사람들이 되었다. 우리는 죽은 자들이니 죽은 사람들은 자기의 뜻이나 원이 있을 수 없다. 오직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하느님의 백성들이다. 이렇게 죽음의 생활을 할 때 비로소 우리는 참된 사순절을 살아가는 것이 된다. 그 죽음의 삶의 대가는 바로 참사랑으로 나타나는 우리의 형제애 이웃애와 하느님을 위한 사랑의 결실로서 참된 사순절 헌금이 이루어질 것이다. 우리 주위에는 너무나 많은 불우한 사람들 도움을 죽도록 호소하고 있는 형제들이 살고 있다. 그러나 교회는 다시 말하면 우리 한국 교회는 흔히 이러한 것들을 외면했다. 기껏해야 외원 단체의 힘을 빌려서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현실이다.
이것은 곧 우리의 의무를 남에게 넘겨주고 있는 것이며 타인들한테 우리 의무를 뺏기고 있는 것이다. 아니 이미 뺏겨버렸다.
우리는 무엇을 했는가? 우리 공동체가 무엇을 했는가? 저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들은 울고 있는데… 우리도 예수와 같이 우리의 생활을 다 내어줄 때 모든 불우한 자들을 다 도와줄 수 있을 것이다. 감히 어떻게 우리가 죽지 않고 예수의 그 영광의 부활을 바랄 수가 있겠는가? 이번 사순절에는 우리 공동체 전체가「죽음의 삶」을 산 그만큼의 대가를 인성회를 통해 이웃을 도와줌으로써 예수의 참사랑을 실천하도록 결심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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