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년 전 강원도 외진 시골에서 경춘선 열차를 타고 서울로 향하던 때 제 나이 열네 살이었습니다.
전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진학을 못한 채 1년을 보내다 외숙을 따라 서울로 올라오고 있었지요.
떠나올 때 어머니의 울먹이시던 음성이 달리는 기차 소리에 엇갈리면서 내 귓가에 맴돌았습니다.
『얼마나 공부가 하고 싶으면 혼자 서울 갈 생각을 다 했겠니. 언제부터 그런 생각을 다 했더란 말이냐? 부모 된 것이 부끄럽다. 자식을 낳아서 남들처럼 가르치지 못하고 어린 것 모진 일 시키고 먹여 살리지도 못했으니 어찌 부모라 하겠느냐』
그러나 저는 아닙니다. 저는 말없이 엄마와 헤어졌지만 내 마음으로는 이렇게 결심을 했었지요.
『엄마 내 걱정은 말아요. 나 말고도 언니랑 금숙이랑 재수랑 동생들이 많이 있지 않아요? 난 어떻게 해서든지 서울에서 취직해서 내 돈으로 학교 다닐 테니까 내 걱정은 말구 남은 식구 걱정이나 하시라구요. 아빠께서 수술 받고 병원에 누워 계신 지 오래 되었지 않아요?』
서울로 온 나는 휘경동 일대를 뒤지다시피 해서야 고향 언니가 있는 공장을 찾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찾아간 저를 보고 29살의 조장 언니는『얘 너 열네 살이면 너무 작다. 어디 일 해내겠니? 밥 좀 더 먹고 와야겠다』하면서 받아줄 수가 없다는 듯 농담을 했습니다.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한 발자국도 이 공장을 물러서지 않겠다고 울며 떼를 섰습니다.
착한 조장 언니는 담요를 포개놓고 키 작은 나를 편물 작업대 앞에 앉혀 주었습니다.
조장언니는 겉으로는 뚝뚝해 보이지만 무척 다정한 분이었습니다.
처음 일을 배울 때 불량품을 내서 쩔쩔매면 익숙한 솜씨로 손 봐서 난처한 처지를 모면해준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고 엄마처럼 보살펴 주기도 했습니다. 십이 월 24일에 취직을 했는데 해가 바뀌어 1월 29일이 되자 월급이 나왔습니다.
『얘 받아라. 식대 빼니까 겨우 3백 원이다. 어떻게 견딜 수 있겠니?』
『기술도 없이 첫 술에 배부를 수 있나요?』
나는 그 돈을 조장 언니에게 맡기자 언니는 은행에 적금을 들어주셨습니다.
그리고 내 향학에 대한 소원을 들으시고는 밤마다 영어를 조금씩 기초부터 가르쳐 주셨습니다.
『나이 들었는데 너 학교 가면 중 1부터 시작할 수 있겠니? 독학했다 2학년이나 3학년에 편입해야지.』
언니의 친절에 눈물이 나왔습니다.
1년 만에 오만 원짜리 적금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가벼운 감기 기운인 줄 알았던 것이 입원해서 편도선 수술까지 받느라 그 오만 원을 몽땅 날려 보냈습니다. 실망하고 있는 저에게 조장 언니는 격려를 해줬습니다.
『얘 그 정도 가지고 실망하면 여자가 아니다. 그깐 1년 더 학교 가는 것을 보류하면 되지 않니? 학교 낙방해서 재수한다고 생각해봐.』
나는 용기를 얻고 다시 작업대 앞에 앉아 일을 하고 적금을 들었습니다.
그러기를 1년. 내 나이 열일곱이 되자 적금은 또 오만 원이 되었습니다.
나는 조장 언니의 주선으로 야간학교를 다닐 수 있도록 신설동 모 회사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그러나 이때 식당의 할머니가 더 편한 자리를 구해준다고 저에게 친절을 베풀었습니다.
나는 그 할머니를 따라서 어느 식당 같은 곳을 갔습니다.
창이 울긋불긋하고 여기저기 탁자가 놓인 술 파는 집이었습니다.
『아줌마 아주 순진하게 생겼구려』
그 할머니의 딸이라는 마담이 나타나자 할머니는 나를 이곳에 남겨두고 떠나버렸습니다.
『호호 몸매도 아주 곱구나』
『뭐라구요? 이 손 놓으세요 난 가겠어요』
『간다구 너 여기 있으면 돈 많이 버는데두 가겠니?』
『난 그런 돈 싫어요. 그런 더러운 돈으론 공부 못해요 난 가겠어요』
『가긴 어딜 가?』
마담은 내 앞을 딱 가로막았습니다.
『넌 팔려온 몸이야. 그 아주머니한테 돈 줬다구』
『뭐라구요?』
『여기 잘 있어봐. 정들면 괜찮아.』
『싫어요 팔리다뇨 내가 물건인가요』
『왜 이래 난 그 아주머니에게 돈 줬어요』
난 그 돈을 물어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무서운 소굴을 빠져나왔습니다. 제 스스로 제 몸값이라는 돈 3천 원을 주고 나오니 캄캄한 밤이었습니다. 낯선 서울에서 달리는 차 오가는 사람들이 모두 악마나 승량이 괴물처럼 보였습니다.
나는 무서웠습니다. 마음 속으로 고향에 계신 어머니 아버지 동생들을 마구 불렀습니다. 갈 데가 없는 나는 다시 조장 언니가 있는 공장으로 갔습니다.
나는 다시 공장에서 일을 했습니다.
그때 간신히 회복되신 아버지가 저를 데리러 오셨습니다. 이번에는 어머니가 병환을 얻으셔서 급한 수술을 받고 계시다는 겁니다. 나는 꼬박 3개월을 어머니 병구완을 했습니다. 다시 서울로 온 저는 구로동 공장에 소개되어 처음으로 착실한 기능공의 대우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열여덟 살에 야간여중 2학년에 편입을 하게 되었습니다. 다니는 도중 공장이 잠시 문을 닫아 껌팔이도 하고 신문 배달도 했습니다. 얼마 후 공장이 또 문을 열었습니다.
마침내 졸업식 날이 왔습니다. 불우하고 가난한 야간학생들의 졸업식-. 초라하지만 우리의 졸업식은 고난을 이기고 얻은 졸업장이기에 눈물겹고 감격스러웠습니다. 고등학교 진학을 동생들을 위해 포기하고 열심히 적금을 들었읍니다. 저축 많이 했다고 국무총리 표창장도 받고 이제 50만 원짜리 전세집도 제가 장만했습니다. 모두가 착한 조장 언니의 덕분입니다. 조장 언니가 아니었으면 아직도 무작정 상경하는 청소년들을 노리는 마수에 의해 어떻게 되었을지 누가 알겠습니까. 끔찍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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