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시는 우선 그 내용에 따라「자연 계시」또는「초자연 계시」로 나누어진다.
자연 통해서도 하느님 인식
1)자연계시~하느님께서 자신의 모습을 자연적인 방법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줄 수도 있다. 예컨대 우주에 가득 차있는 질서의 조화, 모든 생명과 대자연의 신비를 통해서 자신의 권능과 위대함을 보여주신다.
사도 바오로의 말씀을 들어본다.『사람들이 하느님께 관해서 알만한 것은 하느님께서 밝혀 보여주셨기 때문에 너무나도 명백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신 때부터 창조물을 통하여 당신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과 같은 보이지 않는 특성을 나타내 보이셔서 인간이 보고 깨달을 수 있게 하셨읍니다』(로마서 1, 19~20)
이렇게 우리는 하느님의 작품인 대자연을 보고서 하느님의 위대하심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자연 현상을 통해서 다시 말해 인간 이성의 능력으로 깨닫는 방법이다. 이런 계시를「자연계시」라고 한다. 이 자연계시에 바탕을 둔 철학을「특수형이상학」또는「자연신학」이라고 한다. 이것은 마치 어떤 작품을 놓고 그 작가의 평가를 하는 인간 이성에 기준을 둔 내용이기 때문에 이것을 자연계시라고 한다. 그러나 교의 신학상으로 말하는 협의적인 의미는 이런 자연계시가 아니고 초자연적 진리를 깨우쳐주는 초자연 계시를 말한다.
2)초자연적 계시~초자연적인 진리를 밝혀주시는 하느님의 말씀이다. 다시 말해서 과학적으로 분석이 될 수도 없고 논리적인 이론으로 실증적인 내용도 될 수 없는 자연 진리를 넘어서는 말씀이다. 이것은 긍극적으로 이성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초월적인 세계, 즉 신비의 세계이로 접근시키는 말씀이다.
초자연계시는 그 내용에 따라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우리의 인생 종말과 죽은 다음의 문제에 대한 가르침이다.
「죽음」이란 상황 앞에서는 어느 인간도 체험해 볼 수도 없고 실증을 할 수 없는 인간능력의 한계 밖의 문제이다. 여기에 대해서 성서는 하느님의 새로운 생명이 약속되어 있고 영원한 구원의 길이 있음을 가르친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죽은 다음에도 우리에게는 천국영복이 약속되어있다는 말씀이다.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에 비추어 보면 지금 우리가 겪고있는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곧 피조물에게도 멸망의 사슬에서 풀려나서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스러운 자유에 참여할 날이 올 것입니다』(로마서 8, 18~20)
계시통해 내세 알게 돼
죽은 다음 내세에 대한 확신을 계시에서우리는 배운다. 초자연적 계시의 내용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도 성사를 받게되면 하느님의 구원의 은총을 받을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다시 말해서 이 현세에도 직접 감각적인 체험을 할 수 없는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과 은총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은총은 실증적인 자연과학적인 진리가 아니고 하느님의 가르침에서 오기 때문에 역시 계시의 내용이다. 계시되는 그 내용은 또 다시 전 인류를 위한 공적계시와 어떤 특정한 공동체 또는 어떤 개인을 위한 사적계시로 나누어 진다.
공적 계시는 전 인류의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공적 가르침이다. 공적계시는 신약시대 신도들로부터 끝난 것으로 교회는 가르친다.
『이 계시를 올바르게 탐구하고 적절히 표현하기 위하여 로마 교황과 주교들은 일의 중대함을 알아본분상 적절한 방법으로 온갖 노력을 다하는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공적계시를 신앙의 유산으로 받아들이는 일은 없다』(제2차 바티깐 공의회 교의헌장 25항)
공적계시는 성경ㆍ성전에 표현
이렇게 교회에서는 이제 더 다른 공적계시는 인정치 않고 성서와 성전에 나타난 공적계시로 인류구원의 길은 충분히 밝혀졌다고 교회는 가르친다.
사적계시는 하느님이 특별히 간택한 영혼에게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개별적으로 밝혀지는 내용이다. 또 성모님이나 다른 성인 성녀들을 통해서 특정한 영혼들에게 하늘나라의 신비와 하느님의 독특한 은총을 보여줄 수 있다.
예컨대 루르드ㆍ파띠마의 성모님의 메시지 같은 것을 교회는 사적계시로 인정한다.
흔히 우리 주위에서 어떤 기적이 나고 어떤 메시지를 받은 사람이 있다면 그것도 역시 사적계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교회가 공식적으로 인정을 하지 않는 한 공개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구체적으로 어떤 곳에서 성모님이 눈물을 흘리셨다고 하자, 그것을 교회가 공적으로 기적으로 또는 계시로 인정하지 않는 한 신자들은 그것을 믿을 이유가 없다. 그러나 그것을 개인이 교회정신에 따라 아름답게 수용할 수도 있다. 특히 사적계시는 언제나 기적이 따르고 그다음 그것을 믿을 수 있느냐? 하는 신앙의 문제가 뒤따른다. 계시와 신앙은 밀접한 관계가 있고 계시를 수용하는 자세는 곧 신앙이다. 그러므로 다음 장에는 계시와 신앙 문제를 다루지 않을 수 없다. 다시 말해서 계시는 우리 교회의 근본적인 교의신학(敎義神學)의 과제가 되고 그 신학은 신앙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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