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5일, 공산군이 북에서 처내려온다는 뉴스가 들려왔다. 지난밤 자정부터 시작됐다는 것이다. 그와 함께 남쪽으로 가는 피난민 대열이 줄을 잇기 시작했다. 국도와 철길을 따라···걷거나 혹은 온갖 수송수단을 다 동원해서…』이른바 6·25, 처절했던 민족상잔의 비극을 바로 그 현장에서 지켜본 한 미국인 군종신부의 종군일기가 최근 발견됐다. 패트릭 헨리 클리어리 신부(한국명 길 신부·이하 길 신부라 칭함), 메리놀회 소속으로 6·25발발 당시 서울대목구 서정리본당에서 사목을 담당했던 길(吉) 신부의 종군일기는 6·25발발후 흥남철수작전까지 10만여명의 민간인을 남쪽으로 철수시키면서 그가 겪었던 한국의 전쟁과 피난민들의 비참함, 생사를 건 탈출작전 등 역사적 사실들을 생생하게 담은 증언자료로 그 가치가 높이 평가되고 있다.
전쟁의 참담함과 피난민들의 고통을 함께 치뤄내는 과정을 성직자의 입장에서 또 종군신부의 위치에서 소상히 그려낸 이 종군일기는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않는 그러나 결코 잊을 수 없는 우리 민족의 수난, 그 아픔의 역사를 극명하게 밝혀주고 있다.
40여년간 미국 메리놀회 본부 서고에서 잠들어있던 길 신부의 종군기는 흥남철수작전 당시 길 신부와 함께 10만명에 달하는 민간인들을 철수시키는데 기여한 현봉학 박사(현재 미국 로버트 W. 존슨 메디칼스쿨 교수)의 노력에 의해 햇빛을 보게됐다. 개신교 신자로 6·25때 유엔군 10군단의 통역을 맡았던 현박사는 길 신부가 펼친 흥남철수작전의 숨은 이야기가 오랜 세월동안 드러나지 않고 있는 사실을 안타깝게 생각, 미국 메리놀회 본부와 수차례 연결 끝에 길신부의 일기를 찾아냈던 것.
메리놀회로부터 일기 사본과 함께 유익하게 사용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은 현박사는 일기사본을 평소에 친분이 있는 신태민(토마스·미국거주)씨를 통해 한국 계성출판사 최종오씨에게 전달했고 이 일기는 다시 본보에까지 전해지게 됐다.
길 신부의 종군일기를 들고 지난 8월 한국을 찾은 현봉학 박사는 일기를 전하는 자리에서『자신은 지난 67년 신동아잡지에 흥남철수 작전의 숨은 이야기를 발표한바 있으나 정작 길신부의 훌륭한 활동을 밝히는 작업이 한국교회측에서는 전혀없다는 사실이 무척 안타까왔다』면서『길 신부님은 긴박했던 철수작전 당시 성직자답게 영웅적으로 민간인들을 돌보았고 완벽하게 철수임무를 수행한 분』이라고 회고했다.
『역사적인 큰사건의 현장속에서 보여준 가톨릭교회의 숨은 역할을 정확히 알리고 싶었다』는 현박사는『길 신부의 일기를 한국땅에 널리 알리는 일이 한국과 한국민을 위해 헌신했던 그분께 조그만 보답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1950년 6월 24일부터 시작된 길신부의 일기는 다음날인 6·25발발로 이어져 12월 13일 흥남철수작전 개시, 철수작전 완료, 그리고 51년 2월 군종사제직 사임에 이르기까지 약 8개월간에 걸쳐 계속되고 있다.
1923년 메리놀회 초기 한국선교사로 입국, 평북 의주에서 사목활동을 시작한 길 신부는 번 신부(후일 方주교), 모리스(睦) 신부와 함께 평양교구 창설을 준비했으며 평양교구 창설후에는 관후리·중강진·기림리 등 북한지역 교회에서 사목활동을 폈다. 41년 태평양전쟁 발발로 일제당국에 체포돼 메리놀회 모든 성직자와 함께 강제추방 당했으나 광복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사목하던중 서정리본당에서 6·25를 맞았다.
전쟁이 터지자 귀국보다는 군종신부를 자원한 길 신부는 그 시각부터 격전지역의 한국민과 신자들을 남쪽으로 철수시키는데 최선을 다했고 그 과정을 간략하게 그러나 소상히 일기로 남겼다.
특히 북진하는 유엔군을 따라 다시 북한땅을 밟았던 그는 북녘땅 곳곳에서 체포, 납치되고 죽음을 당한 무수한 성직·수도자들의 소식과 파괴된 교회의 모습을 목격하고 증언을 들었으며 이 역시 일기속에 소상히 수록, 교회사적으로도 귀한 자료를 남긴셈이 됐다.
한국교회사 연구소장 최석우 신부는『군종신부로 흥남철수작전에 참여, 수많은 민간인들을 철수시켰다는 사실만으로도 새로운 발견』이라고 강조하고『특히 수복후 북한교회의 실상을 단편적으로나마 기록으로 남기고있다는 것은 충분히 기대되는 자료』라고 평가했다.
신병으로 51년 군종을 사임한 길 신부는 일본 메리놀회를 거쳐 그동안 세인트루이스 메리놀수녀회 지도신부를 역임했으며 70년 9월 6일 선종, 현재 뉴욕 메리놀회 본부묘지에 잠들어 있다.
한편 본보는 전쟁발발 직후 가장 긴박했던 8개월간의 과정들을 수록한 길 신부의 일기를 철수작전이 전개되기 시작한 12월 13일을 기해 연재, 잊혀진 역사의 한 페이지를 되찾아 보기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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