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론
요한 바오로 2세께서 1978년에 교황에 피선되신 다음 곧이어서 방문하신 두 나라들은 현대교회안에서 마르크시즘과 그리스도 사이의 관계문제가 어떤 형편에 놓여있는지를 상징적으를 잘 보여준다.
1979년 5월 그분이 개선장군처럼 당신의 조국 폴란드를 방문했을 때, 그분은 무신론적 마르크스주의 이데올로기에 먹혀들지 않으려고 사력을 다해 저항하는 가톨릭 교회를 찾아간 것이었다.
그런데 그보다 조금 전에 멕시코의 푸에블라에 갔었을 때 그분이 만난 교회는 무엇보다도 가난과 억압의 문제로 고민하는 교회였고 그런 문제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으로서 마르크스주의적 사태 진단방식과 그에 따른 전략을 어느정도 받아들이는 교회였다.
똑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각 교회가 처해있는 구체적 상황에 따라 마르크스주의를 대하는 그태도에는 이처럼 극단적으로 다른 바가 있었던 것이다.
한스 큉도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 신자로서 마르크스주의자가 될 수 있을까? 아니, 신자라면 마땅히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어야하지 않을까?』
중부유럽의 현실참여파 신앙인들에게 있어서 이 당위성은 더이상 의문에 부쳐질 필요도 없을만큼 명백하다. 그들은 지금 한걸음 더나아가 그리스도교와 사회주의를 서로 화해하게하고 그 사이를「대화 관계에서 결속관계」로 바꾸어야한다고까지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 성급한 결론을 내리는 일에 대해서 엄중한 경고를 하지 않을 수 없다. 각 나라와 대륙에따라 그 안고있 는 사회 정치 및 신학적 문제들이 너무나 다르고 복잡하기 때문에 일촉즉발의 이 예민한 문제는 그것이 신학적으로 또 정치적으로 정당화될수 있는 경우라해도 오늘날에 와서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신중한태도와 분별력을 요구한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각 나라나 정치적 권력이 처한 구체적 상황을 면밀하게 고려하여 각 지역에 알맞는 대답을 찾아야 한다.
이 문제에 대한 반응은 사회주의 국가들과 서유럽의 여러나라의 경우가 다를 것이고. 제1세계와 제3세계 혹은 제4세계가 다를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 대한민국이라는 공간에 있는 교회로서는 이 문제가 어떤 형편에 있는가?
우선 지정학적 관점에서 앞에본 폴란드와 남미의 위치는 우리 자신의 입장을 이해하기위해서도 좋은 지표가된다. 폴란드의 교회가 교조적 마르크스주의를 실제의 정치현실로 경험하고있는 사회안에 들어있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마르크스주의에 대해서는 저항관계만을 유지할뿐, 그걸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거나 대화관계를 모색해 볼만한 여지가 거의없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거기에 비해서 남미의 교회는 우선 지리적으로 공산주의 실체와는 멀리 떨어져있고, 사회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의 폐단만을 너무나 절실히 체험하는 사회안에 놓여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마르크스주의를 대하는 태도에 폴란드 교회의 경우와는 다른데가 있다고 할 수 있을것이다.
이같은 기준을 우리 한국교회에 옮겨놓고 볼 때, 우리는 거기서 폴란드와 남미교회의 중간이 가고 할 수 있는 스스로의 위상을 의식한다.
우리사회가 공산주의의 정치적 실체속에 들어가 있지는 않지만, 지리적으로 그것과 직접 대치해있다는 사실은,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우리 교회의 입장을 폴란드와 남미교회의 중간정도로 규정한다고 할 수 있겠다는 말이다.
그래서 남미 교회처럼 자본주의 체제가 노정하는 사회적 불의를 분석해내고 그것을 개선하는 일에 있어서 예언자적 감각을 가지고 적극 뛰어들며, 그 일을 수행함에 있어서 사회현실의 분석도구로서의 마르크스주의로부터 다소의 도움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 남미와는 다르고 폴란드와는 비슷하게 마르크스주의를 하나의 이론이나 사회현실의 분석도구로서가 아니라, 엄연한 정치적 현실로서 가깝게 대치하고있는 우리로서는 남미같은 곳에서 가질수 있는 정도의 여유와 거리가 허용되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르크스주의를 철학적 이데올로기와 사회현실의 분석도구로 구분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해도, 도대체 마르크스주의라 하면 한 몫에 넣어 비판 일변도로 나갈수밖에 없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많이 있음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실상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교회의 전통적 태도와 지난 84년 훈령에서도 재확인 되었듯이, 신 마르크스주의 운동이 앞으로 어떤 추세로 나갈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마르크스주의가 고전적 마르크스주의로 남아있는 한 교회에 대해서는 대단히 큰 위험 요소임이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국부(國富)의 분배에 있어서 노정되고 있는 엄청난 불균형, 기득권자들의 권익 확대쪽으로만 치닫는 제반 정책 등, 우리사회가 마르크스식 비판에 대해 크게 취약성을 보이는 모습으로 존재하는 한, 소의계층을 중심으로 하여 극단적 주장들이 나타날 소지는 항상 마련되어 있는 셈이다.
이런 와중에서 교회가 그것을 극단적 주장이라 하여 일방적으로 비판만 할 때, 그것은 자칫 소의계층 자체를 배반하는 태도로 해석될 여지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문제는 이제부터라도 그런 극단적 주장이 일어날 소지 자체를 제거하는 일이다. 점진적이며 민주적인 방식에 의한 사회변혁이 가능한 정치 및 사회적 분위기를 창출하는데에 교회에서도 응분의 적극적인 노력을 함으로써 마르크스주의를 단순한 사상체계로서뿐 아니라 엄연한 정치현실로 마주 대하고 있는 우리나라 안에서 그소명에 충실하려고 노력하는 한국교회가 그 몫을 다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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