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근거는 계시진리이다. 초자연적인 진리의 수용이 곧 신앙이다. 그러므로 신앙은 지식이 아니다. 여기서 근원으로 지식과 신앙의 구별점을 찾아야 한다. 다시 말해서 자연과학과 종교는 서로 다른 차원임을 알아야한다.
과학ㆍ종교는 서로 다른 차원
「믿는다는 것」~이것은「안다는 것」과는 너무나도 다른 개념이다. 우리는 높은 하느님의 말씀을 믿는다는 종교적인 차원을 떠나서 인간과 인간관계에 있어서「믿는다는」는 의미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나는 그 사람을 잘안다」또는「나는 그 사람을 믿는다」하는 표현에서 후자는 전자보다 훨씬 농도가 짙은 표현이다.
우리는 어떤 사람을 믿는가? 그 믿음은 어디서 생기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예를 들어보자. 누가 서울 종로거리를 지나다가 낯모르는 사람이『선생님 미안합니다만 제가 지금 돈 50만원이 필요합니다. 빨리 좀 빌려 주십시오』한다고 했을 때 누가 그에게 선뜻 돈 50만원을 빌려 주겠는가? 그러나 잘 아는 친구의 부탁이었다면 성큼 그 돈을 빌려줄 수 있다.
전자의 경우에는 전연 모르는 사람이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믿을 수가 없기 때문에 돈을 빌려줄 수 없다. 후자의 경우는 믿을 수 있는 관계이기 때문에 돈을 빌려줄 수 있다. 이런 예에서 우리는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에서도「믿을 수 없는 상황」에서는 인간관계가 성립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매사에 증명을 하고 사실을 알고서 행동할 수는 없다. 인간과 인간의 만남에도『믿음』은 중요한 것이다.
「진실」전제돼야 믿을 수 있어
「믿을 수 있는 관계」그리고「믿을 수 없는 관계」에서 전자는 인간행동이 퍽 자유스럽고 원만하게 이루어진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에는 불안과 초조가 뒤따른다. 「믿을 수 있는 관계」가 되기 위해서는 그 사건이 또 그 사람의 말과 행동이 진실해야한다. 진실이 전제되어야 믿음이 생긴다.
그러니까 믿음은 진실과 통한다. 「믿음」은 곧「진리」를 증거하는 것, 진리를 수용하는 상황이다. 종교인이 무엇을 믿는다는 것은 그것이 진실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리의 세계에서만이 신앙은 가능하다. 어떤 것이든 그것이 거짓일 때는「믿음」을 불러일으킬 수 없다.
인간을 일컬어「사회적인 동물」이라고 한다. 이것은「너와 나와의 공동체 의식」을 의미한다. 「너」와「나」가 한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서 다시 말해서 한 사회성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 밑바탕에「믿음」이 깔려야 하고 그「믿음」에 의해서 우리는 단합과 평화의 사회를 이룬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도 매번 실증주의적인 사고방식이나 이성 제일 주의적인 사고방식으로는 살아갈 수 없다. 무엇보다「믿음」이 앞서야한다. 친구끼리 두시에 약속을 했으면 그 시간에 가보고서야 믿는 것이 아니다. 서로가 서로를 믿을 때 인간관계는 원만해진다. 음식을 먹을 때도 그 음식이 나의 위장에서 어떻게 소화가 되어 어떤 모양으로 그것이 나의 살과 피로 변하는가에 대해서 일일이 증명을 하고서 먹을 수는 없다. 우리는 우리의 인체의 신비에 대해서도 전연 무지하다. 그러니 먹는 것도 믿어야한다. 잠자리에 누울 때도 내가 자는 이 집이 역학적으로 오늘 저녁에 붕괴되지 않는다는 증거를 갖고 잠자리에 드는 것도 아니다. 그것 역시「믿음」으로만 가능하다.
믿음 없이 생활할 수 없어
그 믿음은 우리가 즉각 순간적으로 알 수 없는 진리를 긍정하는 것이다. 그 진리의 긍정이「믿음」의 행위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모든 삶을「지식」으로만 해결하고자하는 사람은 얼마나 어리석은 사람들인가? 그들은 한순간도 살아갈 수 없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들은 이 세상사에는 모든 것을「신앙」으로 잘 살아간다. 국가에서 지폐「만 원짜리」를 내놓으면 그것을 모두가 만원으로 믿고 인정을 하고 그것을 주고 받는다. 그것에 대해서는 추호의 이의나 의심을 품지 않는다. 그러나 인생의 중요한 삶과 죽음에 관한 문제와 죽은 다음에 오는 새 세계의 존재, 영원한 생명의 문제 앞에는 회의를 느끼고「내 생각에는ㅡ?」하는 의문을 품는다.
「내 생각에는ㅡ?」이것은 진리의 기준이 아니다. 그러므로 여기에 온 믿음을 거는 것은 극히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인간과 인간관계 속에서 빚어지는 진실위에 우리는 소위「믿는 관계」가 성립된다. 그 진실의 판단기준은 여러 가지이므로 자신의 상황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 예컨대 그 사람과 약속하면 틀림없었다는 자신의 경험에 기준을 두고 믿음을 가질 수 있다. 그런데 그 믿음의 내용이 하느님의 말씀이고 그 대상이 하느님일땐 우리는 그것을「신앙」이라고 표현한다.
여기서「신앙」할 수 있는 기준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그것은 하느님의 진실하심과 그분의 절대적인 권위에 있다. 여기에『내 생각에는?』하는 자신의 기준으로는「신앙」이 성립될 수 없다.
그것이 믿음을 일으킬 수 있는 동인이 무엇인가 하는「신앙의 동인」은 자신의 이성에 바탕을 둔다. 이것을 신앙의 가신성(可信性)이라고 한다. 그 가신성의 문제는 이성의 문제가 된다. 물론 여기서는 기초신학적인 고찰에서 소위 가신성을 말하지만 교의 신학적으로는 신앙을 갖게 되는 동인이나 그 배후는 하느님의 은총이라고 한다.
하느님과의 믿음의 관계를「신앙」이라고 하고 그 신앙의 내용은 하느님의 가르침이신 계시진리에 근거를 둔다. 그러므로 계시를 받아들이는 수용자세가 신앙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신앙」할 수 있는 이 기준은 가신성이고 그 가신성을 증명할 수 있는 것으로 가끔「기적」이란 증거가 나타난다. 그러므로 계시와 기적 문제가 따라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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