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수선 탁덕 복자 김대건(안드레아) 신부가 굳은 신앙을 증거하며 새남터에서 붉은 피를 흘린 지 올해로 1백31년이 된다. 오직 이 땅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심기 위해 26년의 짧은 생애를 오롯히 바치고 간 순교 복자 김 신부-. 곳곳에 남겨진 피땀으로 얼룩진 임의 발자국에서 지금도 우리는『부디 서로 우애를 잊지 말고 돕고, 아울러 주 우리를 어여뻐 여기사 환난을 걷기까지 기다리라』고 잠잠히 타이르는 임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솔뫼의 울창한 소나무 숲에서, 서해 바람 거센 화산포 나루에서, 또 수많은 순교자의 선혈로 씻겨진 새남터에서 우리와 영원히 같이 할 임의 숨결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1백여 년의 세월이 그토록 긴 탓이었던가, 아니면 후손들의 무관심 탓 때문이었던가-. 피땀 어린 임의 발자욱들이 1백31년의 연륜에 씻겨 점차 잊혀져만 가고 있음은.
■논밭으로 변한 솔뫼 생가
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 산45번지 속칭 솔뫼마을-. 이곳은 이 땅의 수선 탁덕 복자 김대건 신부가 태어난 곳이다.
1821년 8월 21일 역시 순교 복자 김재춘 (이냐시오) 의 아들로 태어난 김대건 신부가 15세의 어린 나이로 사제에의 길을 닦기 위해「마카오」로 유학하기까지 겨레를 구원할 웅지를 가꾸며 자라던 곳이다.
이 유서 깊은 곳이 지금은 옛날의 모습은 찾을 길 없고 울창한 송림으로 덮인 5천여 평의 야산을 뒤로 하고 4~5채의 농가가 이른 봄의 햇살 속에 평화로이 졸고 있다.
김 신부의 生家가 있던 곳은 무심한 村夫의 쟁기 끝에 파헤쳐서 논밭으로 변했고 파릇한 보리싹이 봄바람에 한들거릴 뿐이다.
모진 박해에 쫓겨 응달에서나마 신앙을 지키기에 급급했던 못난 후예들은 성웅의 탄생지에 대한 생각마저 잊은 채 폐허화된 생가를 방치해 두었던 것이다. 늦게나마 이곳을 되찾아, 1백만 신자의 신앙의 요람으로 가꾸어야겠다는 자각이 일어 1946년「성웅 김대건 신부 탄생지 개발위원회」가 발족, 탄생지 일대 대지 4천8백66평을 매입하고 그곳에 순교 기념비를 세웠다.
그러나 이때 정작 김 신부의 생가가 있던 땅은 매입에서 빠진 채 계속 농토로 방치돼 왔다. 지난해 김 신부의 탄생 1백55수년, 순교 1백30주년을 맞아 대전교구는 이곳을 성역화하기로 결정, 대지 추가 매입 및 생가 복원을 포함한 성역화 3개년 계획을 세우기에 이르렀다.
대전교구는「성웅 김대건 신부 성역화사업 추진위원회」를 결성, 당초 금년 2월에 착공할 예정이었으나 준비작업 관계로 늦어져 4월 초에나 공사에 들어가게 됐다. 총경비 2억6천여만 원이 투입될 이 사업은 3개년 계획으로 연차적으로 추진되는데 1차 연도인 금년에는 8천5백만 원을 투입, 생가를 중심으로 한 대지 3천6백81평을 매입하는 한편 180cm 높이의 담장 350m와 150m 높이의 철책 290m를 설치하고 주차장 시설 1600m와 11.8m 높이의 기념탑과 동상, 그리고 관리사무소와 기타 부대시설을 갖추게 된다.
지난 1월부터 사업 추진을 위한 모금운동에 나서 그간 6천5백만 원은 확보됐으나 나머지 2천만 원은 전국 신자들의 성금을 기다리고 있는 실정이어서 앞으로 이 사업의 추진 과정에는 허다한 어려움이 따를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금의환향 터엔 기념비 우뚝
1845년 (丙午) 10월 12일 황산벌을 휘돌아 황해를 향해 유유히 흐르는 금강 하류 군산 앞바다에 수상한 배 한 척이 나타났다.
석양의 타는 듯한 노을을 받아 붉게 물든 금강 줄기를 거슬러 소리없이 올라오는, 돛대도 부러지고 키조차 업는 한 척의 배-.
이「라파엘」호에는 이역만리에서 한국인 최초로 사제의 품을 받고 겨례를 구원하기 위해 조심스런「금의환향」길을 서두르는 김대건 신부와 그의 안내로 이 땅에 복음의 씨앗을 뿌리기 위해 잠입하는 페레올(高) 주교 더블뤼 신부와 안내 역을 맡은 현석문 이재용 등 14명이 타고 있었다.
이윽고 날이 저물어 사방이 칠흑 같은 어둠으로 깔렸을 때「라파엘」호는 강경 황산포 근처에 당도했다. 번화한 황산포 배 터를 피해 일행은 갈대가 우거진 갈대밭 사이를 헤치며 작은 산 아래 후미진 물가에 배를 대었으니 바로 김 신부가 사제의 몸으로 조국에 첫 발을 디딘 전북 익산군 망성면 화산리 1158번지 나바위 성당이 자리잡고 있는 해발 50여m에 총면적 6천7백여 평의 화산이다.
1836년 12월 2일 15세의 어린 나이로 인류 구원의 웅지를 품고 유학길에 오른 김 신부는「마카오」장춘과 상해에서 또 멀리 필리핀「마닐라」에서 고국에의 향수를 달래며 언어의 장벽과 낯선 생활 풍습을 극복하고 신학ㆍ철학을 비롯한 과학ㆍ물리학에 이르기까지 신학문에 몰두하기 10개 성상-.
그에게 안겨진 중대한 사명감을 되씹으며 온갖 고통을 감내, 드디어 1845년 8월 17일 상해 금가항에서 사제품을 받고 한시라도 늦을세라 귀국길을 서둘러 2주일 후인 31일 상해를 떠나 광풍노도와 싸우며 제주도까지 표류하는 등 온갖 위험을 겪고 한 달 13일 만에 조국의 땅을 딛게 된 것이다.
김 신부가 첫 발을 디딘 이곳은 1915년 3월 나바위성당이 설립됐고 1950년에 축조한 제방으로 금강의 물줄기가 변해 화산 바로 아래「라파엘」호가 닿았던 지점은 논밭으로 변했고 화산 바로 아래 물가에 있었다는「나바위」란 바위도 주민들의 굉이 끝에 하나둘 떨어져나가 흔적만 겨우 남아있다. 화산 정상에는 1955년 7월 5일에 세운 순교 기념비가 우뚝 서 그날의 감격을 되새겨주고 있다.
「화산 머리 푸른 로송/예나 오늘 푸르르고/가신 님의 귀한 자최/변함 없이 전하거니/산 우에 순교비는/어느 때나 뵈어 주련」-1953년 김후상 신부가 지은 화산천주교회 약사시의 한 토막에서도 장한 순교의 얼을 제대로 잇지 못하고 있는 후손들의 부끄러움이 가슴을 파고든다.
■먼지에 묻힌 순교지 새남터
솔뫼에서 태어나 15세에 입신한 청년이 수선탁덕의 영예를 순간에 누리고 26년 짧은 생애의 마지막 불꽃을 찬란하게 태우며 죽어간 곳 새남터.
『여러분 죽는 순간에 다다른 나의 말을 귀담아 들으시요. 내가 외국인과 상종한 것은 오직 내가 믿는 종교 때문이요, 내가 위하는 천주 때문이었은즉 내가 지금 죽는 것도 그를 위해서 죽는 것이며 지금 내게는 영원한 생명이 곧 시작되오.』
삼추를 계속 해도 다 못할 흉중을 이 한마디에 담아 사자후를 토하고 쓰러져간 서울특별시 용산구 서부 이촌동 199의 11 옛 처형지 새남터엔 옛사연을 알 리 없는 유치원 꼬마들의 놀이가 즐겁기만 하다.
거슬러 올라가면 장한들이 말타기와 무예를 닦으며 일으킨 모래 먼지를 순교자와 국사범의 피로 적셨던 한강변 광활한 모래톱이 지금은 주위에 빽빽이 들어선 서민아파트와 고가도로에 싸여 고도처럼 블록 담 경계 안에서 정적마저 느끼게 한다.
교회가 새남터 한구석 1천1백1평3홉의 터나마 성지로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순교자 현양에 특별한 관심을 갖는 복자수도회라는 한 수도 단체의 노력 덕분으로 불과 10년 전 일이다.
1950년 주교회의가 순교 성지로 지정 선포하고 신자 한 사람이 당시 돈 50원씩 내어 7백50만 원으로 기념탑을 세우려다 전쟁으로 좌절되고 지금의 철판으로 겉을 싼 30척 남짓한 기념탑이 선 것은 1956년.
그 후 이곳은 1급 순교지로 신자들의 발길이 가장 많이 스쳐가고 1년이면 몇 차례 기념미사나 행사가 꽤 규모 있게 벌어지기도 하더니 몇 해 전부터 서서히 관심권에서 탈락하기 시작, 서울 사는 후예들은 잊어가는데 아직 그 명성만은 기억하는 지방 신자들이 가끔 찾아와 옛 일을 돼새긴다.
『성지도 매스콤 타나 보지요. 제일 뜻있는 곳 같은데 다른 데들만 가니 말이에요』유치원을 하며 관리도 맡고 있는 중년의 수녀는 그래서 조금은 섭섭하지만 누가 오면 보리차나마 대접하고 열심히 안내하는 것으로 면구스러움을 달랜다.
꽃 한 송이 없는 5척쯤 되는 복자 김대건 신부 석상에는 도시의 새까만 먼지가 두껍게 내려앉아 있다.
지금 후손들은 그의 시성에 열을 올리고 있다.
시성이 되는 날 면류관을 씌우려면 먼저 먼지부터 털어내야 할 것 같다.
◆김 신부의 약력
▲1821년 8월 21일 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 산 45번지에서 출생
▲1836년 7월 11일 신학생으로 선발
▲1837년 12월 2일 마카오에 도착
▲1842년 12월 23일 제1차 변문향발 12월 27일 김방지거와 만나 부친 사망 소식 듣고 변문 출발하여 의주성 통과
▲1843년 1월 1일 국경 통과, 만주에
▲1844년 12월 15일 삭발례소품 차부제 부제품
▲1845년 8월 17일 사제로 서품 (긴가함에서)
▲1845년 9월 8일 청국 하직, 9월 28일 제주도에 표착 10월 12일 밤 충남 황산포(강경)에 도착
▲1846년 4월 8일 경기 은이공소 매매실에서 최후미사
▲1846년 6월 5일 순위도 근처에서 잡힘
▲1846년 9월 16일 새남터에서 순교
▲1846년 10월 26일 미리내로 장례
▲1857년 9월 23일 가경자 칭호 (삐오 9세)
▲1925년 7월 5일 시복식
▲1960년 7월 5일 현 서울 대신학교에 유해 안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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