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 세기 전 나라는 일본의 식민지. 1천9백만의 겨레는 피압박 약소민족이라는 설움을 안고 있던 그때, 우리 교회도 1백년 세월의 지긋지긋한 박해시대를 면한 지 45년, 남북 3천 리의 넓은 포교지역을 서울 대구 원산 세 교구가 사목 관리를 맡고 있던 1927년 4월 1일, 대구의 남방천주교 청년회가 一、소식보도 一、의견교환 一、보조일치라는 슬로건을 내걸고「가톨릭시보」의 전신인 <천주교회보>를 창간한 지 올해로 50주년이다. 사륙배판 8면 5호 활자로 본문을 짠 창간호와 첫 해의 지면들을 지금의 안목으로 보면 볼품없는 것이지만 그 당시의 사회적 여건과 상황을 참작하면 대단한 용기와 의욕적인 출발이었고 가톨릭 액션에 자극을 주고 획기적인 계기가 되게 한 선견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열성만으로 출발했던「회보」의 가시밭길은 1933년 4월 1일 창간 6주년을 맞는 글 가운데 다음과 같이 나타나 있다.
『회고하건대 실로 파란곡절이 심하였고 남 모르게 죽을 위험을 당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제2년부터 지면을 확장하고 내용을 충실히 한 연고로 4백51원38전 제3년에는 2백80원64전 제4년에는1백63원98전의 부채를 져서 청년회는「회보」로 말미암아 무려 9백36원이란 거액의 부채를 지게 되었다.…다행히 1931년 7월부터 남방교구(대구교구)의 기관지로 인정되는 동시에「회보후원회」가 창립되어서 매년 2백50원 내외의 보조를 받기 시작하매 차차 숨을 쉬게 되어 제5년 1931년에는 부채 중 33원73전을 갚았고 제6년 작년에는 77원61전을 갚아 작년 말에 8백24원66전의 부채가 남았다. 이대로 발전이 된다면 앞으로는 심히 낙관이다. 하지만 후원회는 원래 창립될 때에 3개년을 기한하였기 때문에 그의 보조도 금년이 마지막이다. 그러고 보니 금년은 무사히 지내간다고 하더라도 내년부터는 또 어떻게 하나…』
이렇게 험난한 길을 걸어 겨우 본궤도에 오르게 되려는 때에 즉 1933년 3월 18일 개최된 전국 5개 교구 (서울ㆍ대구ㆍ원산ㆍ평양ㆍ연길) 주교회의에서『교회 출판물을 통일하여 서울에서만 발행하기로 하며 대구와 서울 청년회에서 각각 발행하는「천주교회보」와「별」보는 발행 중지하고 새로 대외적인 잡지「가톨릭청년」을 발행하기로 한다』는 결정에 의하여 창간 6주년 기념호인 제73호는 폐간호가 되어 일본제국의 사슬이 끊어지는 날까지는 물론 해방 후도 4년을 더 기다려 대한민국이 건국된 다음해에 16년의 침묵 끝에 다시 제74호로서 속간하게 되었으니 이에 앞서 1948년 9월 19일에 결성된 대구교구 (경상남북도) 가톨릭 청년회 연합회의 임시 총회 (1949년 1월 15일) 에서『연합청년회 기관지를 발간하기로 하며 과거「남방 천주교 청년회」의 기관지요 그 후 남방교구 (경산도ㆍ전라도ㆍ제주도) 의 기관지로 빛난 역사와 가톨릭운동에 혁혁한 공적이 있었던「천주교회보」를 계속 간행하는 것이 의의가 있고 또한 역사를 살리는 것이 마땅한 일이므로 이제「천주교회보」를 부활시켜 그 제74호를 발간키로 하며 속간에 있어「회보」의 목적을 ①소식보도 ②보조일치 ③조국성화로 한다』고 결의하였다.
첫번 창간 때에도 그러했거니와 해방 후 복간 때에도 경영자가 교구 당국이 아닌 청년회에서 시작한 사업이라 재정문제가 가장 큰 애로였다.「회보사」로서 기구나 조직이 따로 없었으므로 인쇄 시설도 물론 없었다. 「영남일보」공무국에 조판과 인쇄를 의뢰했는데 일간신문들이 쉬는 주일날을 택해서 작업을 해야 했으며 휴일인데 일을 시키려니 공무국원들에 대해서 노임을 더 후하게 주어야만 했다. 연합청년회 자체도 재정문제로 운영에 어려움이 많으면서 회보 발행 준비 기금으로 마련했던 예산은 제74호 75호 76호 세 번의 용지와 인쇄 대금을 지불함으로써 바닥이 났다.
4월ㆍ5월ㆍ6월호까지는 내놓았지만 7월호부터는 용지대와 인쇄비 지불이 막연하였을 뿐 아니라 교회 내에서 신자들에게 배부하는 종교신문이기 때문에 계출만 하면 즉시 허가될 것으로 쉽게 생각했던 발행 허가가 의의로 까다로와 세 번 발행한 것은 무허가 간행물로 취급받게 되었으므로 우선 발행 허가를 얻는 일부터 해야만 했다. 「구비서류 미비」란 이유로 두 차례 허가 신청서가 반려되어 왔기 때문에 다시 서류를 만들어 제출하는등으로 시일이걸려 49년8월초에 비로소 정기간행물로서 대한민국공보부 등록번호를 받게되었다.
당시의 교구장 요한 최덕홍 주교께서는「회보」의 육성을 위해 1년간의 인쇄비를 교구처에서 부담해 주시기로 하셨는데 즉 교구청 내(現 대건고교 건물 선 자리)에 옛날 남산본당 강당으로 건립된 건물에 인쇄 시설을 하고「대건출판사」를 설립키로 했는데 여기서「회보」의 인쇄를 하게 한다는 조건이었다.
1950년 봄 교구청에서 인쇄비의 보조 기한도 4개월밖에 남아 있지 않아 그 다음 일을 대비하지 않을 수 없어 연합청년회의 간부들은 여러 차례의 연구 토의 끝에 연합청년회의 간부 중 최재복 총무부장이 관리 책임 아래 있는 계산동「취주악기 12인조」를 주교께 드리기로 하고 (주교께서는 이를 대건학교에 주시도록) 그 대신 주교님이 2백만 원을 대건출판사에 증자를 하여 주시면 그 증자에 대한 이익배당조로 대건출판사는「회보」의 인쇄ㆍ용지ㆍ실무자 인건비를 부담하기로 한다』는 교구청과 청년회 간부 사이의 합의가 이루어져 2백만 원 증자금액 중 50만 원이 6월 27일 대건출판사에 지급되었다.
그러나 국가와 민족과 한국 교회 최대의 수난! 저 6ㆍ25 전란으로 말미암아 모든 상황은 일변하였다.
제83호(1950년 5월 25일)를 배부한 후 제84호를 배부하기까지는 5개월이 걸려야 했던 것이니 계엄령이 선포되어 모든 간행물은 새로 계엄사령관의 허가를 받고 군의 검열을 받아야 했을 뿐 아니라「회보」의 인쇄공장인 대건출판사는 공군본부와 국방부 정훈국 인쇄소로 징용되어「공군순보」「정훈주보」등 군의 인쇄 일꺼리로 밤낮 없이 바쁘고 붐비었으며 성당을 제외한 모든 교회 건물이 군용으로 징발되는 때라 회보사의 책상들까지 군용에 쓰여지게 되었다.
제84호를 11월 10일 배부한 후 필자는 12월 1일부터 교회가 경영을 인수하게 된 대구 매일의 기자를 겸무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인쇄공장 사정 출판비 상정 등이 겹쳐서 제85호를 인쇄하기까지는 또 2개월이 걸렸으니 이런 상태로는「회보」의 발행을 계속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으므로 최 주교께서는 청년회 간부들에게「회보」의 경영을 교구청에 넘겨줄 것을 종용하셨다.
1951년 5월 6일 제89호부터 대구교구에서 경영을 인수했으며 월간에서 월 2회간으로 증간하고 발행인을 최민순 신부로 명의 변경 신청 5월 20일 제90호부터 발행 편집인 명의가 바뀌었으나 발행소의 이름은 당부간 연합청년회의 명의를 그대로 사용하였으니 청년운동에 대한 사기를 꺾지 않도록 하려는 뜻이었다.
1952년 12월 제100호 기념모임에서「천주교회보」의 이름을「가톨릭신문」으로 제호 변경하기로 하여 공보부에 변경 신청을 했으나 일간신문이 아님으로 법규상 없다는 규정에 따라「가톨릭신보」로 변경했다가 다시 1954년 1월(제137호)부터 현재의「가톨릭시보」로 부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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