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창문을 여니 새삼 싱그러워지는 감흥. 신선한 공기, 밝게 드리우는 햇살을 맞으며 인간은 근본적으로 지향적 존재임을 느낀다. 우리의 마음이 어디를 향하여, 무엇을 향하여 있지 않다면 이 밝은 아침 햇살과 더불어 싱그러움과 희망찬 생기를 느낄 수 없으련만…우리는 분명히 느낀다. 맑은 햇살 신선한 공기가 우리의 정감에 광희를 불러일으키는 것을. 더 나아가 새로움에로 개발되어 있는 인간의 순수한 기본 자세를. 희망의 약속이 주어지는 순간을! 그러나 인간은 태어날 때와 같은 자세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한계의식 앞에서는 보고 다시 보아도 세상의 소용돌이, 20세기의 현대인이 살아가는 이 현실인 걸 어쩌랴! 하오나 은총의 빛 속에 눈 뜨는 세상, 악몽을 뚫고 들려오는 구원을 하고 승화시키는 현실의 소리가 있다.『두려워 말라.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요한 16ㆍ23)
인간은 구체적으로 종교를 가졌든 안 가졌든 종교적 존재, 즉 하느님을 생각할 줄 아는 존재 초월성에 개방된 존재가 아니던가?
미래에 대한 끊임없는 물음이 현실의 삶에서 긴장을 조성하는 까닭에 우리는 몸부림치며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저 영원을 향해 질주하고 있는 게 아니런가. 그러면『무엇이든지 받아들여지는 것은 받아들이는 자의 양배에 의해 결정된다』는 공리가 의미하듯 영원의 의미 그리스도교적으로 부활과 영생의 의미를 받아들이는 데는 우리의 자세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가? 물론 여기에 주어지는 것(하느님의 은총)은 전제되어야 한다.
그러기에 역사 개벽 이래 神과 인간 사이에는 숱한 대화가 필요했었나 보다. 그런데 이 대화가 그리스도에 이르러 전적으로 새로운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고 고백하는 그리스도 신앙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자.
그리스도 신앙인은 말한다.「아버지와 하나인」인간, 그를 통해 하느님의 영원 안에 인성이 들어서게 된 인간 그리스도에 이르러 비로소 인간의 미래가 결정되는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실존 안으로 실제로 들어온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은 피곤한 나그네로서의 여정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공생이다. (그리스도교 신자라면 Rassinger 저 장익 역「그리스도 신앙 어제와 오늘」197P를 한 번쯤 읽어보아야 한다.) 그러면 좋다.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현실의 고충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상 고통에 비한다면 정말 아무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드니까 인생의 어떤 어려움도 능히 극복할 자신이 생기고 한 번 해볼 만한 의욕을 얻는다.
그러면 죽어야 할 운명을 지닌 인간인 우리는 이런 희망적 사고 위에서 예수 부활의 의미를 좀 더 추적해 보자.
신앙에서 개시되는 그리스도와의 공생은 이미 시작된 부활 생명이며 따라서 죽음을 넘어 계속된다. (필립1ㆍ23 코린 후 5ㆍ8) 신앙의 대화는 이미 죽음으로 인해 파멸될 수 없는 생명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구원은 이미 성취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원의 역사는 남아있다. 은총은 완전히 주어졌지만 그 적용은 남아있다. 내가 은총을 받지 못한다면 은총은 나와 무관한 것이 돼버린다. 이것이야말로 크리스찬 공동생활에 부과되는 현실적인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리스도 자신이『부활이요 생명 (요한 11ㆍ25)』이시기에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는 것이 어떤 의미로는 하느님으로부터 인정받고 사랑 받는 저 불사의 경지에 들어감이 된다. 『누구나 아들을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갖는다』(요한 3ㆍ15~16 3ㆍ36ㆍ5 24)
이렇게 볼 때 부활의 의미는 종말론적 성격을 띠게 된다. 누구나 믿는 사람은 자신이 생명 자체이시며 죽음을 초월하는 하느님과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이와 같은 신학적 답변이 구체적 현실 생활에서는 어떤 형태를 띠어야 하는가? 교회 공동체는 그리스도를 몸으로 신자들을 지체로 하는 사랑의 공동체이다.
신자들은 하느님 나라의 도래가 이루어지고 구원의 역사가 완성으로 다가서고 은총의 표현이 성취되는 현장으로서의 교회 안에서 세상은 구원될 것이며 저 마지막 날에 부활하리라는 신앙으로써 그리스도를 닮아가야 한다.
이 길이 십자가의 길이지만 고통의 십자가는 영광의 십자가로 바뀔 것이며 십자가를 통해서만이 주님을 뵈올 수 있기 때문이다. 십자가를 받아들이지 않고는 부활의 의미를 깨달을 수 없다. 하느님은 세상이 구원되고 우리 인간이 모두 구원되길 원하신다. 순간순간을 다하는 삶이야말로 십자가를 옳게 받아들이는 행위이다. 지상에서의 삶이 영원한 생명으로 건너간다는 것이 단지 바람으로써만 이룩되는 것은 아니다.
예수께서 또 다시 부활하셔야 했다. 예수 부활은 역사적 사건의 하나로만 종식될 수는 없다. 우리의 신앙이 좀 더 생동적이라면 현재적 상황으로 절감할 수 있으리라.
우리 인간에게 있어 하느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다면 이보다 더 큰 행복이 그 어느 곳에 있을까?
특집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