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미줄처럼 얽힌 지하철을 몇 번인가 갈아타고 중국 음식점을 찾아 저녁을 먹고「루르드」행 야간열차를 탔다. 11시간 후인 21일 아침 8시45분 성녀 베르나뎃따가 1858년에 무릎을 꿇고 성모와 대화하던 바로 그 장소에서 우리는 추위에 몸을 옴추리며 미사를 드리고 묵주의 기도를 바쳤다. 무언가 말을 걸 듯한 성모상, 그 반대편 윗쪽에는 환자들이 버리고 간 목발 31개가 촛불 연기에 그을린 채 매달려 있고 동굴 안 기적의 샘 옆에도 최근에 버린 듯한 목발 15여개가 팽개쳐져 있었다. 동굴 옆으로 나오는 기적수에 목을 추긴 우리는 성녀가 살던 물방앗간으로 갔다. 2층에 있는 성녀의 나무 침대는 순례자들이 더 이상 나무를 칼로 베어 가지 못하게 철망으로 둘러싸 두었고 그 옆에 성녀의 냉담한 친척들이 경영한다는 기념품 상점이 잇달아 있다.
점심 때 이상훈 신부가 몸소 뛰어다니며 사온 빵 고추ㆍ고기ㆍ빠다ㆍ포도주를 공원 벤취에서 나눠 먹고 성모의 메시지를 들었다.
「죄인을 위해 하느님께 기도하고 보속하라. 샘물에 가서 씻고 마셔라. 여기에 성당을 짓도록 하고 행렬을 지어 오길 원한다」메시지대로 동굴 위엔 묵주성당과 무염시태성당이 층층이 세워졌고 그 앞 광장엔 3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삐오 10세 지하성당이 있었다. 성당 내부에는 성모로부터 입은 은혜에 보답하는 사람들의 정성으로 꾸며졌고 장군을 비롯한 장병들이 성모께 봉헌한 수많은 훈장 군도(軍刀) 각종 깃발들이 즐비했다. 특히 돌벽에 새겨진 수많은 글귀 가운데『성총을 가득히 님 우신 마리아여 네게 하례하나이다』란 한글 기도문도 있었다.
1876년 박해시대 백 주교가 한국 교회를 마리아께 봉헌한 기념으로 새겼단다. 성당 안에는 24시간 기도하는 성체조배실도 있었다.「루르드」는 한 마디로 기도의 장(場)이었다. 아침 일찍부터 동굴 앞과 성당에서 미사가 계속 봉헌되고, 그때마다 간호원이나 봉사대원이 끄는 휠체어에 몸을 실은 환자들이 각국에서 온 수많은 순례자들과 함께 참여했다. 오후 4시 성체거동 때는 수백 대의 휠체어가 몰려들었다. 저녁 7시쯤에 있는 촛불행렬이 장관이라지만「빠리」행 야간열차 시간에 쫓겨, 기적수만 수통에 담고 묵주의 기도를 바친 후 발길을 돌렸다. 이상훈 신부는 다시 빵과 고추ㆍ밥ㆍ상추까지 사가지고 왔다. 왕복 야간열차를 이용함으로써 호텔비가 들지 않았고, 식당에 들리지 않았던 것은 식비 부담을 줄이기 위해서였다.
우리야 고행길을 각오했지만 우리의 순례길을 주선하고 함께 행동하며 자상하게 안내한 이 신부의 희생은 참으로 컸다. 22일 아침「부루제」공항에서 석별의 악수를 할 땐 감사의 말문이 막혀 한참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브룻셀」에서 예정에 없던「코펜하겐」으로 가서 1박하게 된 것은 안개 때문이었고「대만」에서 1박한 것은 대한항공의 정비 불량 때문이었다.
성지와 성지의 표정들을 제한된 지면에 제대로 표현 못한 것이 못내 안타깝고 독성죄를 짓는 것 같아 두렵기도 하다. 15일 동안 10개국을 거쳐 오면서 보고 듣고 느낀 것, 우리가 범한 실수와 얽힌 일화도 많지만, 75 성년이 성탄축일 가정에 끝남으로 이 순례기도 여기서 줄인다.
이번 순례를 주선하고 도와준 복음화성성 당국과 교황대사 도쎄나 대주교 및 여러 신부들에게 다시 한 번 감사드린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