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에게는 친자식보다도 남의 자식이 더 많습니다. 결혼 4년 만에 모진 고생 끝에 배를 가르고 낳은 내 자식 말고도 큰 시숙의 아이들 7명, 그러니까 저는 아이들이 8명이나 있는 대가족의 주부인 것이지요.
19세의 어린 나이로 신혼에 부푼 기대를 갖고 결혼을 한 것이 벌써 17년 전이 되는군요. 손이 열이래도, 발이 열이래도 모자랄 정도로 바빴던 시간들이그리도 빨리 지나간 것이 의심스러울 정도입니다.
어려서 부모를 잃은 저는 오빠의 보살핌으로 컸습니다. 사랑이 결핍되었던 제가 그렇게 일찍 결혼을 했던 건 사랑으로 가득 찬 가정을 갖고 싶어서였습니다만 …
제가 결혼한 후 감당해야 할 무지막지한 고난은 결코 기대하지도 원하지도 않던 것이었습니다.
결혼 5개월이 채 못 되던 어느날, 남편의 유일한 형제인 시숙이 급작히 돌아가셨지요. 시부모님을 모시고 살아가시던 맏이신 까닭에 우리 부부가 시부모님을 모시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시숙모마저도 7째인 아이를 낳다가 그만 숨지고 말았습니다. 아기는 유복자로 살아남았고 초랑초랑한 눈망울로 이 엄청난 비극을 알지도 못하는 조카아이들은 하루아침에 고아가 된 것입니다.
20세의 나이로 아직도 신혼의 꿈이 채 피어오르지도 못한 채 저는 남편의 호소로 이 아이들을 모두 맡아서 기르게 되었습니다.
젖먹이 녀석이 젖을 달라고 울어대면 10식구의 분주한 아침상을 차리다 말고 동네방네 뛰어다니며 아주머니들에게 젖을 구걸하는 날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습니다.
남편은 직장 때문에 멀리 떨어져 있었으니 그 어린 나이에 저는 시름시름 앓는 시부모님을 비롯한 가여운 자식들을 거느린 가장이었지요. 농사일 밭일 빨래 … 등의 막일을 해야 하는 고달픈 가장-
남편은 한 달에 한 번씩 들러 자기가 쓸 최소한의 돈을 제외하고는 월급을 몽땅 내놓고 가는 게 고작이었습니다. 이것으로 저는 쪼르르 늘어선 꼬마들의 손에 학용품값을 쥐어 주어야 했고 새 학기마다 학비를 대야 했으며 더구나 큰아들의 죽음에 충격을 입고 병을 앓기 시작하면서 도무지 일어날 기색이 없이 대소변조차도 가리지 못하시는 시부모 내외의 약값까지 지불해야 했습니다.
젊은날에 화장품도 발라보지 못한 채 이른 새벽부터 밤이 깊도록까지 부지런히 일을 해도 끊이지 않는 일감들에 시달리면서 저는 몰골이 사나와지고 손발이 트기 시작했습니다.
맏딸이 소아마비로 발을 절었습니다. 그래선지 이 애는 신경이 날카로와서 커갈수록 나를 친엄마가 아니라고 번번히 미워했습니다. 심지어는 집을 나가라고까지 했지만 저는 이 애들의 가련한 처지를 잊지 않고 그 많은 투정을 받아주자고 결심을 했습니다.
병신이 배우기까지 못하면 더 비참한 사람이 된다는 생각으로 맏딸을 계속 진학시키고 열심히 공부시키기 위해 격려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왜 시련은 꼬리에 꼬리를 물며 그칠 줄을 모르는 것인지-
어느날 저는 시냇가에 나가 땔감을 베어오다가 심한 복통과 구토를 느끼고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걷는지 기는지 뒹구는지도 모르게 집에 도착했으나 증세는 며칠이 지나도록 가시지 않았습니다.
과로와 영양실조에 겹쳐 여기에 결혼 4년 만에 임신을 했던 것입니다.
조카아이들의 뒤치닥거리에만 시달리다가 내 아이를 갖게 되는 자부심에 저는 가슴이 부풀어올랐습니다.
이즈음 오빠가 오랜만에 저를 만나러 왔다가 얼굴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상한 저를 보고는 펄쩍 놀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동생이 이비참한 생활에 몹시 노하여 남편에게 심한 꾸짖음을 하시고 저를 오빠 댁으로 끌다시피 데려가셨습니다. 그 후로 저는 오빠 내외의 따뜻한 정성으로 생전 처음 그렇게 호강하면서 지내긴 했지만 마음은 불안할 따름이었습니다.
불행, 또 불행-
과로와 영양실조의 영향으로 저의 한쪽 다리에 골수염이 생기기 시작하였읍니다. 아무리 치료를 해도 소용이 없었고 결국에는 한쪽 다리를 잘라내고 말았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아기는 제가 절름발이로 낳았습니다. 더구나 오빠의 염려대로 순산이 되질 않아 제왕절개 수술을 해서 위험한 고비를 몇 번이나 넘기며 낳은 아이입니다.
17년.
숱한 고통과 시련이 제게 도전했던 기나긴 투쟁의 시간, 그러나 이젠 뒤를 돌아보며 나는 어느 정도 승리를 한 것이라고 흐뭇해할 수 있습니다. 절망의 고통과 싸워 이긴 승리자.
맏이는 불구를 딪고 열심히 노력해서 지금은 성숙한 여대생이 되었고, 둘째인 맏아들은 전쟁터에서 숨진 아버지의 뜻을 기리겠다고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그리고 아직 교복을 입은 다섯 아이들 … .
잘 크겠지요. 제가 더 바랄 것은 없습니다. 아무쪼록 이 아이들이 부모 없이 자라나 성실하게만 살아간다면 제 일생을 희생한 보람이 있는 것이라고 믿을 따름입니다.
▲12월 28일 11시~12시 사이에 MBC「절망은 없다」시간에 방송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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