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씨를 처음 배우던 시절 나는 칭찬받는 모범생이었다. 다 쓴 공책은 선생님에게 보여드렸고, 그러면 공책 끝에는 반드시 빨간 잉크로 내 나이만큼의 동그라미가 나를 기쁘게 해 주었다. 일곱 개 혹은 여덟 개의 동그라미가 아버지나 엄마에게 보여졌을 때 그것은 별사탕이 되기도 하고 사과알이 되기도 했다. 공책 끝에 쓰여진 선생님 말씀-『참 잘 썼어요. 조금만 더 잘 쓰면 선생님 보다 더 예쁜 글씨가 되겠어요』-이것은 새 공책의 첫자를 쓸 때부터 또 정성들여 글씨를 쓰게 하는 영약(靈藥)이었다.
이렇게 번번히 새 공책을 받으며 살아온 세월, 어느 틈엔가 내 공책 끝에는 빨간 잉크의 동그라미도 선생님의 격려 말씀도 사라져 보이지 않게 되었지만 그러나 새 공책을 받으면 묵은 공책에 쓰여진 것보다 더 곱고 아름다운 글씨를 쓰려고 애쓰게 되었고 또 묵은 공책의 잘못 쓴 글자들을 확인해 보는 버릇에도 웬만큼은 익숙하게 되었다.
펼쳐보니 묵은 공책 갈피에는 참으로 많은 눈물 자욱이 얼룩져 있다. 비바람에 삭아버린 옛날 비석의 글씨처럼 이제는 잉크빛도 바랜 낡은 공책 쪼가리에서 나는 본다. 일장기(日章旗)를 휘두르며 대동아전쟁터로 끌려가서는 영영 돌아오지 않은 삼촌을 본다. 뒷뜰에 놋주발이랑 쇠붙이를 파묻다가 하늘 끝에 높이 떠가던 은빛 날개를 가르키며 그것이 미국 비행기 B-29라고 알려 주시던 아버지, 그 아버지께서 그토록 고대하던 해방을 맞으시고도 그해 겨울 상여(喪輿) 위에 덩그마니 관(棺)으로 뉘여 실려 가시던 광경을 본다. 자고나도, 자고나도, 30촉 어두운 전등불 밑에서 바느질을 하시던 어머님을 본다. 6ㆍ25가 지나간 뒤 폭격에 맞은 집터가 웅덩이로 패였던 것을 본다. 무릎까지 눈 속에 묻히며 이불짐 하나를 지고 엄마랑 동생이랑 하루 종일 삼십 리도 못 가던 1ㆍ4 후퇴 길을 본다.
문득 글씨가 사라지고 담배 목판을 메고 시장 바닥을 누비던 내 모습이 보인다. 양담배 몇 갑을 미군 헌병에게 빼앗기고 천지가 망막하여 울던 내 중학교 시절이 다가온다.
슬피 슬피 많이도 울었다. 분노와 서글픔이 한데 북받친 울음이었다. 그러나 울다보니 나는 슬프고 화가 나서 우는 것이 아니라 고마워서 운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보이지 않는 손길, 보이는 손길들이 나를 뜨겁게 감싸고 있었다. 울음은 점점 깊어졌으나 울음소리는 점점 작아지더니 눈물은 겉으로 흐르는 것이 아니고 가슴 속으로 마구 넘친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나는 고등학생이 되고 대학생이 되었다. 그리고 또 어른이 되었다. 부지런히 남을 배우고 있었는데 돌아보니 나를 흉내내는 젊은이가 많아졌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내 표정은 조금도 점잖고 조금은 거만하게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제보다도 어제, 어제보다도 오늘 더 많은 눈물을 가슴으로 흘리며 산다. 정성스러이 꽃밭을 가꾸는 원정(園丁)이 있어서 하잘 것 없는 꽃씨 하나가 탐스러운 꽃을 피우게 되듯이 나를 꽃피우려는 원정들의 손길을 느끼면서 나는 철철철 눈물을 흘리며 산다.
오늘 내가 또 새 공책을 받으면 나는 첫 머리를 또박또박 정성들여 이렇게 적어 나가겠다.
「하느님, 새해에는 더 많이 울겠습니다. 나를 아는 사람 나와 인연 있는 모든 사람들은 모두 나를 사랑하는 줄 아옵고 그들 속에서 당신을 찾으며 고마움에 흐느껴 울겠습니다.」
1976年 새해 아침에.
특집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