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에서 태어나서 스물두 살 되었을 때 경기도 양근지방 마재에 사는 정약종의 후실로 들어갔다. 정약종은 명도회의 초대회장이며 교회 초창기 열심한 교우의 하나였던 만큼 남편의 권고로 출가온 지 불과 3년 만에 입교하여 남편과 한가지로 열심 수계하게 된 것은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니다.
1800년 양근 지방에 박해가 일어나자 세시리아는 남편을 따라 서울로 피신해 왔다. 이때 어린 자녀들과 함께 周문모 신부에게 영세하였다.
다음에 신유년 서울에서 큰 박해가 일어나서 이 박해로 남편과 전실의 아들 哲祥이가 순교하였다. 이때 세시리아도 잡히어 어린 자식들을 데리고 옥에 갇혔다가 얼마 후 석방은 되었지만 이미 가산은 몹수되어 의지할 데가 없었다.
세시리아는 큰딸과 일곱 살의 하상과 다섯 살의 엘리사벳 이렇게 어린 3남매 외에도 전실의 자부와 그 아들 등 모두 5명의 의지할 곳 없는 불쌍한 것들을 돌보아야 할 막중한 책임이 있었다.
친척들은 한결같이 죽음이 두려워서 그들을 맡으려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편의 친구가 그들을 마재로 데리고 와 약전 등 시숙들에게 붙여 살게 하였다. 시숙들은 차마 그들을 내쫓지는 못했으나 그들을 도우려 하지 않으므로 이때부터 세시리아에게는 빈궁과 시련의 나날이 시작되었다.
얼마 안 되어 12세의 큰딸과 자부와 조카를 잃게 되니 오직 세시리아는 슬하의 남매를 키우는 것으로 낙을 삼고 의지하며 지내던 중 아들마저 부득이 교회일로 서울로 가버렸다. 모녀는 주님의 안배에 전 소망을 걸고 빈궁을 참아냈으니 그 사이 모녀가 겪은 고통을 어찌 다 형언할 수 있을 것인가.
서울로 올라온 아들 하상은 신부를 맞아들이기 위해 북경을 왕래하기 시작했다. 한 번은 북경 주교가 하상에게 집안 소식을 묻더니 노모와 누이를 외교지방에 버려 둠이 불가하다는 것이었다. 귀국하자 하상은 주교의 분부대로 모친과 누이를 서울로 몰래 모셔 와 같이 살았다. 세시리아는 아들과 다시 같이 살게 된 것을 천주께 감사드리며 그의 열심을 배가하였다.
그 후에도 아들은 여러 번 북경길을 떠나야 했다. 아들의 하직 인사를 받을 때마다 세시리아는 이번이 마지막 이별이 아닌가 하여 그 마음 속에 괴로움과 안타까움이 그지 없었건만 모든 것을 주 성모께 의지하고 떠나는 날부터 6ㆍ7개월 동안 아들을 다시 보려는 희망에서 열심히 기구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세시리아 일가는 서울에서 다시 충청도로 이사했다. 수계하는 데 좀 자유롭지 않을까 해서였다.
그러나 6ㆍ7년 만에 서울로 되돌아왔는데 아마도 1827년 이 지방에 있었던 박해를 피해서 온 듯하다.
신부와 주교가 잇달아 들어오고 아들이 주교를 모시게 되니 세시리아는 주교와 같은 집에 사는 영광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제 7순의 고령인지라 직접 주교님에게 시중 들지는 못했으나 그 대신 날마다 닭이 울면 일어나서 미사에 열심히 참여했다. 또한 성사를 자주 보고 대재를 지켰으며 애인하는 마음이 간절하여 가난한 사람을 만나면 으레 자기 차지의 밥을 주는 것이었다.
기해년 2월 박해가 치성해지자 하루는 조카가 와서 시골로 피신하기를 권했으나 세시리아는『나는 늘 치명하기가 소원이었다. 이제 그 기회가 왔으니 아들과 함께 치명하련다』고 말하며 거절했다. 주교마저 피신한 뒤로 모녀는 날마다 시간마다 포졸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사이에 아들도 주교를 피신시켜 드리고 돌아왔다.
드디어 9월 9일(7ㆍ19) 허다한 포졸이 달려들어 거기 있던 세시리아와 바오로와 엘리사벳 남매 하인 김데레사 5명을 다 체포하여 포장에게 대령시켰다. 포장이 세시리아를 향하여『네가 천주학을 한다는 말이 과연 사실이냐』고 물었다. 세시리아는『과연 사실입니다』고 대답하였다. 이에 포장의『배교하고 일당을 대라』는 말에 세시리아는『비록 죽는 한이 있어도 배교는 할 수 없습니다. 또한 저와 같이 아주 나이 많은 늙은이가 무슨 분별이 있어서 사람들을 알 리가 있겠습니까. 사실 아는 사람이란 없습니다』고 대답하였다. 하는 수 없이 세시리아를 옥에 가두게 했다.
그 후에도 세시리아는 다섯 번의 문초를 받았고 문초 때마다 50도의 매를 맞음으로써 도합 230도의 매를 맞았으나 그의 마음은 한없이 태연하기만 했다. 세시리아는 칼날 아래 순교하기가 실로 소원이었다.
그래서 늘 오 주 예수의 수고 수난에 관한 이야기를 하며 그 무한한 은혜에 감격해마지 않았다. 그러나 노인일 경우에도 목을 베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
세시리아는 옥에 갇혀 있는 5개월 동안 열두 차례의 문초와 동시에 무거운 형벌을 받음으로 마침내 그의 기력이 핍진하여 옥에서 선종하니 때에 그의 나이 79세요 10월 18일(11ㆍ23)이었다.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예수 마리아의 성명을 부르기를 그치지 않았다.
세시리아는 실로 3남매의 순교자를 낳은 장한 어머니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한국 교회가 낳은 가장 훌륭한 순교자의 한 분인 정아오스딩의 배필이기도 하다.
(계속)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