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에서 큼직한 주유소를 경영하다가 졸지에 파산을 당하고 맨손으로 일을 시작하면서 두 달 정도면 나아질 수 있겠지 했지만 어느새 두 달이 십사 년이나 되는 시간으로 흘러갔습니다. 머리엔 벌써 흰 머리카락이 희끗희끗 보이고 아이들이 모두 어른이 되었으니 … 정말 세월은 유수 같이 흐르는군요.
남편은 중령으로 제대를 한 후 8년 간이나 주유소를 경영하면서 꽤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부산에서도 남부럽지 않게 살았으니까요. 그러나 우리가 이렇게 큰 시련을 격어야 했던건 남편 친구의 빚 보증을 잘못 서게 된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잘못했거나 실수를 한 것이 아니었는데 우리는 주유소는 물론 가재까지, 아이들의 피아노ㆍ장난감까지 모두 빼앗기고 한데 나서게 된 것입니다. 전 재산 20만 원을 갖고 우리는 낯선 전라도 보성으로 떠났습니다. 남편은 여기서 재산을 다시 만들어 부산으로 떳떳하게 돌아갈 예정이었지요.
어느날 남편이 장사를 시작하겠다고 20만 원을 가지고 나갔다가 소매치기에게 당했을 때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던 심정은 어떠했을지 상상해 보십시오. 마지못해 나는 일수로 돈 5백 원을 빌려다 죽으로 끼니를 이어 가보기로 했지만 모두가 절망뿐이었습니다.
맏딸 정희가 4살이었으니 정애ㆍ정미가 말도 못하는 갓난애들이었습니다. 이 애들을 고생시킬 용기가 도저히 나질 않아 하루는 약방에 가서 약을 사고 오랜만에 중국집에서 짜장면을 시켜다 배불리 먹이고 집단자살을 할 결심을 했습니다. 그러나 남편의 눈물어린 설득으로 우린 죽음을 각오하고 다시 열심히 살아가자고 다짐했습니다.
그 후로 저는 시장에 나가 생선 장수를 시작했고 남편은 부산으로 가서 친구의 일을 돌보기로 했습니다. 전쟁터 같은 생선 장수 틈에서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면서 첫날은 15원 이튿날은 20원 … 의 돈을 벌어 갔습니다.
정희가 중학교엘 들어갔습니다. 그앤 언제나 일등만 하여서 떠나지 않는 가난이란 고통 속에서 가장 보람된 낙이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남편이 부산에서 돌아왔습니다. 또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생겼나 하고 가슴 덜컹하는 내게 남편은 편지 한 장을 말없이 내주었습니다. 정희가 미납우편으로 아버지께 보낸 편지였습니다.
『배가 고파요 … 엄마가 머리에 생선을 이고 팔러 다니며 고생을 해요 … 아버지, 같이 모여 살아요』
남편은 부산에서 친구를 도우면서 부지런히 목수일을 배운 덕으로 목공소를 차렸습니다. 저도 장터에서「경상도」로 통하는 틀 잡힌 생선 장수가 되어 나날을 행복한 가정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역시 가난의 굴레는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학교에서 모범인 정희 어머니로 저는 장한 어머니상을 타기도 하면서 아이들의 교육에 온 정성을 쏟으며 보람차게 일했습니다. 애들이 여고 여중에 들어가면서 저의 머리는 희끗희끗해지기 시작했지만 말예요.
한결같이 우리 곁을 떠나지 않던 가난-남들 같이 쌀도 한 말씩 사 보았으면 연탄도 몇 십장씩 쌓아놓아 보았으면, 애들에게 고깃국도 끓여 주었으면 하면서 열심히 돈을 벌었지만 외상으로 넘겨온 생선값은 계속 밀려가기만 했습니다.
어느날 생선 도매인이 찾아와 오늘은 빚을 갚으라고 딱딱거리는 바람에 뜻하지 않게 싸움이 벌어졌고 나는 그에게 심하게 구타를 당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 후는 이들이 찾아와 용서를 빌었고 홧김에 고소를 할 수도 있었지만 어찌나 정이 떨어졌던지 10년을 살아온 보성을 떠나 왜관으로 집을 옮겼습니다.
왜관에서 식당을 경영하는 고모님의 도움으로 저는 그곳 기지촌 아가씨들의 빨래도 해주고 시간제로 밥도 하면서 월 이만오천 원씩 벌 수 있었고 남편은 포항제철 신축 공사장으로 돈 벌러 떠났습니다. 월세 천오백 원과 아이들 교육비 그리고 여고 3년이라서 보성에 혼자 남은 정희 생활비를 포함해서 우린 그럭저럭 현상 유지를 하며 살 수 있었습니다.
이젠 빚도 없이 새로운 각오로 돈을 벌어 볼 양으로 살아가던 중 우린 뜻하지 않던 불행을 맞아야 했습니다. 남편이 공사 중 지붕에서 떨어져 부상을 당하고 치료비를 받아 가지고 집으로 돌아온 것이었습니다.
모든 생활비가 남편의 치료비로 쏠리게 되고 보니 날이 갈수록 궁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내가 일해 주던 여자가 아이를 안고 찾아와 한 달에 양육비로 오천 원씩 줄 테니 길러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얼떨결에 받긴 했으나 혼혈아인 이 깜둥이 아이가 왠지 마음 내키지 않았습니다.
드러누운 남편과 갓난아이 주니어에 신경 쓰다 보니 어느새 추운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왔습니다. 그리고 장한 우리 딸 정희가 졸업장과 상장을 안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집안엔 새 기운의 웃음꽃이 피었고 정희의 도움으로 집안 살림도 많이 보탬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 달 주니어의 양육비가 안 오기 시작하더니 주니어가 네 살이 되던 해 그 아이의 엄마는 어디론지 행방을 감추고 말았습니다. 아이를 고아원에 맡기라는 말을 남기고 그때는 이미 내 자식과 같이 정이 들었고 모두 가족 같이 지내던 때라서 도저히 고아원엘 보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린 아이의 이름을 철수라고 고치고 이젠 아주 친아들인 양 사랑해 주게 되었습니다.
14년 … 어느새 정애가 여고를 졸업하게 되었습니다. 남편도 많이 나았고 …
저는 아직도 빨래를 해주며 가계를 꾸려 나가고 있지만 이젠 한결 마음이 가볍습니다. 이 녀석들을 어떻게 고생하며 키우나, 하고 막막했던 때와는 달리 고생을 오히려 낙으로 삼을 수 있을 만큼 가족이 모두가 강해졌으니까요.
글쎄 철수가 무어라는 줄 아세요? 이 담에 돈 많이 벌어서 울엄마 빨래하는데 손 시럽지 않게 고무장갑을 사주겠다고요. 호호, 터무니 없으면서도 어찌나 눈물겨운 말인지 꼭 안아 주었지요
〈매주 일요일 오전 11시 10분~12시 사이에 MBC서 방송〉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