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랍 14일「바티깐」시스틴 경당에서는 교황 바오로 6세가 동방정교(東方正敎) 대주교의 발에 입을 맞춤으로써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음은물론 이 사실이 매스콤을 통해 세계에 알려지자 세계 종교계 특히 동방정교회들은 갈라진 형제들과의 일치를 염원하는 교황의 뜻을 평가했다.
교황의 입맞춤은 가톨릭-동방정교 간 상호 파문 철회 10주년을 기념하는 미사에서 동방정교 수좌 디미트리오스 1세 총대주교가 보낸 멜리톤 대주교가『동방정교는 로마 가톨릭과 신학문제들을 협의할 범 동방정교 위원회를 조직키로 했다』는 발표에 대한 답례였다.
가톨릭과 동방정교 간 9세기 간에 걸친 상호 파문을 폐기한 것은 1965년 교황 바오로 6세와 아테나고라스 1세 총대주교에 의해서였다. 상호 파문 철회 10년을 맞아 이를 바탕으로 이제 양교는 일치를 향한 거보를 내딛게 됐다.
동방정교는 동유럽과 중동지역에 걸쳐 신자 1억을 확보하고 있는 지배적인 크리스찬 공동체로 동방가톨릭과는 달리「로마」와는 아무런 관계를 맺고 있지 않다.
로마 가톨릭에서 동방정교가 분리된 데는 무엇보다 문화적 배경이 주원인이 됐다.
로마 가톨릭 즉 서방교회는 라틴문화에 그 바탕을 그리고 동방교회는 비잔틴 혹은 그리스 문화에 그 바탕을 두고 있어 같은 크리스찬 교리가 서방과 동방에 따라 달리 받아들여졌다. 그것은 비단 언어나 풍속의 차이뿐이 아니라 사고방식에서까지 서로 다르게 나타났다.
이처럼 상이한 사고방식의 충돌은 삼위일체 교리를 둘러싸고 일어났다.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는 전 크리스찬의 신조로 채틱돼 동ㆍ서방교회 전례에 함께 사용돼 왔으나 6세기 초에 와서 서방신학이 발전되면서 종래「성신은 성부에게서 발함을 받으셨다」에「성신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발함을 받으셨다」로「성자에게서」가 종전 신조에 삽입되자 동방교회는 이를 용납될 수 없는 탈선이라 선언했다.
이와 아울러 문화적인 마찰은 정치적 경쟁에 의해 더욱 치열해졌다.「콘스탄티노플」이「알렉산드리아」「안티오키아」「예루살렘」등의 교회를 지배하게 되자 동방정교는 서방의 라틴 문화를 배격하고 비잔틴 문화를 수호하는 데 박차를 가했다.
바로「로마」에 대한 문화적 반기는 858년 포씨우쓰가「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가 된 후 맹렬한 교회 투쟁으로 전개됐다. 결국 교황 니꼴라오 1세와 포씨우스 간의「성자에게서」논쟁은 상대방이 서로 파문을 선언함으로써 종식됐다.
그러다 양교가 정식으로 파문을 선언하고 일체의 관계를 끊게 된 것은 1054년 교황 레오 9세와「콘스탄티노플」의 미카엘 첼루라리우스 총대주교 때였다.
당시 첼루라리우스는 다소의 로마 가톨릭 풍습이 크리스찬적이 아닌 유태적인 것이라고 선언하고 로마 가톨릭이 지켜오던 토요일 단식과 성체성사에 발효 안 된 빵의 사용 등을 거부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로마 가톨릭의 사제 독신제가 비크리스찬적이라고 단정하고 자신의 총대주교 관구 내에서 이 같은 행위를 금지시킴으로써 그곳의 모든 라틴 전례교회 가문을 닫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사실에 접한 레오 9세 교황은 특사를 파견, 첼루라리우스의 처사를 중단토록 했으나 듣지 않자「바티깐」은 첼루라리우스를 파문했으며 동방정교 시노드는 일주일 후 교황을 파문했다.
그 후 동ㆍ서방교회의 재결합을 위한 노력은 여러 차례 있어 왔다. 1274년「리용」공의회와 1439년의「플로렌스」공의회 이후 양교 간의 일치는 잠정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서방 군인들이 모슬렘의 공격으로부터「콘스탄티노플」을 방어하겠다던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1453년 모하메드 2세에 의해「콘스탄티노플」이 정복되면서 서방과의 모든 관계는 다시 두절되고 말았다. 근세에 들어 동방정교 지역 국민들이 서방의 문화와 정치적 영향을 받게 되면서부터 개인 혹은 소그룹 단위의 재결합 움직임이 엿보이기 시작했다.
그 후 로마 가톨릭의 교황과 동방정교 총대주교 간의 해후는 1964년 1월 4일 교황 바오로 6세가「예루살렘」의 베네딕또스 총대주교를 만났으며 다음날 전 동방정교 수좌인「콘스탄티노플」의 아데나고라스 1세 총대주교와 역사적인 상봉을 가졌었다. 바로 디미트리오스 1세는 아테나고라스 1세의 후임자로 선임자의 뜻을 이어 받아 로마 가톨릭과의 일치를 위해 이번에 범 동방정교 위원회를 조직하게 됐다.
동방정교는 교황의 법적 수위권과 무류성 및 삼위일체 교리에서「성자에게서」와 성모 마리아의 무염시태 등에 있어 가톨릭과 의견을 달리할 뿐 그의 7성사 사제직 가톨릭과 같은 주교 및 사도전승제도를 갖고 있으며 수 세기에 걸쳐 공의회도 개최해 오고 있다.
앞으로의 문제는 서로 다른 문화를 배경으로 9백 년이 넘도록 갈라져 있었던 양교가 서로 간의 대화를 통해 어느 정도까지 간격을 좁힐 수 있는가에 귀추가 주목된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