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소문 밖에서 사형이 집행된 지도 어언 석 달이 흘렀다. 그리고 척사 윤음이 반포된 지도 한 달이 훨씬 넘었다. 그러나 정부의 기대와는 달리 배교자는 아주 적었고 따라서 감옥은 좀처럼 비지가 않았다. 이에 11월 24일 정부는 새로운 공식 처형을 결정하기에 이르렀으니 그간 정부로서 공식으로 사형 집행하기를 얼마나 꺼렸는가를 미루어 알 수 있다.
금번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참수 치명의 영예를 차지한 복자들은 오늘 이야기하려는 최베드루를 위시하여 정하상의 누이동생이며 동정녀인 정엘리사벳 조발바라의 맏딸 동정녀 이막달레나 이미 순교한 남세바스띠아노의 부인 조발바라 앞으로 순교하게 될 박종원 회장의 부인 고발바라 서울 회장 현갸오로의 누이동생이오 여회장인 현분다 중국인 류 신부에게 복사한 한막달레나 이렇게 남교우 하나에 여교우 여섯 도합 일곱 분이었다.
최창흡은 이 용감하고 영광스러운 순교 대열의 우두머리로서 교회 안에서는「여칠」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창흡은 신유년에 순교한 서울의 총회장 최창현의 동생이다. 그의 집안은 중인 계급에 속해 있었으나 형이 박해의 대상이 되기 전까지는 대대로 벼슬을 해 왔다.
창흡의 성품은 부드럽고 온순하였으며 무엇보다도 놀라우리 만큼 겸손하여 언제나 남을 좋게 판단하고 자기 자신은 남만 못한 줄로 믿고 있었으므로 모든 이와 아주 화목하게 지낼 수 있었다.
형이 순교하던 신유년 창흡의 나이 겨우 열세 살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때의 형의 나이 43세였으니 아마도 이복형제가 아닌가 생각된다 아무튼 창흡은 형의 순교 후 파산을 당한 집안의 자손으로서 나이가 어려 교리를 잘 모르는데다 지도자들도 거의 희생되어 가르침을 받을 만한 사람도 전혀 없고 보니 외교인이나 다름없이 지내게 되었다. 박해 후 3ㆍ4년이 지나자 교우들이 차차 모여들고 다시 일어나게 됨에 따라 창흡도 교우들을 만나게 되고 교리와 경문을 배울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직 열심히 믿으려 하지 않았다.
거외 30세가 돼서 결혼을 하였고 역시 서울 출신인 손막달레나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아내도 원래 봉교하던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역시 신유박해로 부친을 잃었고 모친도 일찍 여의게 됨으로써 조모 밑에서 교리를 배우고 차차 수계하게 되었다.
1821년 콜레라가 유행하여 급작히 많은 사람이 죽어감을 보고 창흡은 부인과 한가지로 대세를 받게 되었고 이래 부부가 함께 열심히 봉교하였다. 그 후 1833년 중국인 유빠치피꼬 신부의 입국을 계기로 신부의 교훈과 성사의 은혜로 힘을 얻어 열심을 배가하였다. 이 무렵 모든 교우들로부터 모범적인 교우라는 평판을 듣게 되었지만 베드루는 스스로 한탄하며 늘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과거의 내 행실을 생각하면 내 영혼을 구하기 위해선 치명하는 길밖에 없다』순교에 대한 그의 원의는 이렇듯 간절하였다.
기해 오월에 박해가 치열해져 감에 따라 그의 순교에 대한 소망도 치열해져만 갔다. 그러나 그는 주명을 기다리기로 하고 집안 식구를 데리고 일단 사위의 집으로 피신했다. 그의 사위는 당시 교회의 저명한 인물 중의 하나인 바로 조신철이었다. 결국 여기서 음력 5월 중에 모두가 붙잡혀 갔다.
베드루는 열한 명을 낳았으나 그 중 아홉 명은 어려서 죽었으므로 이때 베드루와 그의 부인 손막달레나 그의 큰딸 발바라와 두 살 된 어린 딸 이렇게 네 식구가 잡혔다. 그러나 두 살짜리 젖먹이는 육정의 유혹이 두려워 떼어 친척에게 맡겼다.
포장이 우선 베드루를 대령시켜 이렇게 문초하였다.『네가 사학을 하느냐』『천주교에서 가르치는 진리 중에는 사특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과연 천주교를 봉행합니다』『천주를 배반하여라』『못합니다』『언제부터 그 교를 믿었느냐』『어려서부터입니다』이때 포졸들이 모두『이 놈은 그 교의 늙은 학자야』하고 빈정거리며 그를 모욕하는 것이었다.
문초 일곱 번에 문초 때마다 주뢰를 돌리우고 곤장을 맞았다. 치도곤 도합 150도를 치며 번번히 배교하고 동교인을 대라고 위협했다. 그러나 이러한 잔혹한 형벌이 도리어 베드루의 열심을 더할 뿐이었고 한편 형벌 중에서도 그는 지난날의 자기 자신의 죄를 뉘우치기를 그치지 않았다.
형조로 이송된 후에도 포청에서와 다름없이 형관 앞에서 똑같은 문목과 형벌을 받았으며 마침내 형문 3차 후에 사형 선고를 받았다.
11월 24일 (12ㆍ29) 서소문 형장으로 나갈 때 한 옥졸에게 옥에 있는 자기 부인과 딸에게 전해 달라고 하며『눈물과 고통은 육정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도리어 주를 찬미하고 이같이 큰 은혜를 감사하며 나의 뒤를 따르라』고 말하였다는 것이다.
베드루는 수레 위에서도 기도하기를 그치지 않고 형장에 도착하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앞으로 숙였다. 순간 뒤에 있는 사람에게 머리를 돌리고『천국에서 같이 만나야 합니다. 잘 준비하십시요』란 말을 남긴 다음 칼을 받고 순교를 완수하니 때에 그의 나이 53세였다. 부인과 딸도 과연 그의 뒤를 따라 한 달 후에 순교하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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