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고학으로 대구 사범을 졸업하고 경북 청도 풍각국민학교에 재직하고 있을 때 27살의 총각 교사가 부임해 왔습니다. 정말로 신비한 것은 사랑의 감정이어서 우리는 운동장의 잔디에서 퍼붓는 소나기 속에서 한적한 한내 강둑에서 행복한 앞날을 설계하고도 밤에는 온통 서로를 생각하는라 잠을 이루지 못할 지경이었습니다. 그해 가을 우리는 결혼식을 올렸고『번지 없는 주소엔들 어떠냐 조그만 방이나 하나 얻고 우리 단 둘이 살자 … 』운운의 장만영 시「사랑」을 읊조리며 초가집 셋방에서의 달콤한 신혼 생활에 들어갔습니다.
이듬해 그러니까 1960년 남편은 대구로 전근되어 50학급이 넘는 큰 학교의 연구 주임으로서 전국적인 연구 집회와 세미나에서 크게 활약을 했습니다. 그러나 출세 작전이다 출장이다 하여 저축은 커녕 빚을 짊어지게 되었습니다.
토요일 오후마다 임신한 몸으로 백 리 길로 버스에 시달리며 남편의 하숙방을 찾아가면 남편은 일요일 자정이 가까와서야 술에 만취되어 돌아오는 것이었습니다. 집에 돌아온 나는 그때부터 불면증에 시달려 수면제를 상용했고 그것이 원인이 되어 태아였던 첫 아들의 뇌를 상하게 한 몹쓸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그 후 남편은 다시 내가 근무하는 금촌면으로 전근해 왔고 우리는 첫 아들을 낳았습니다. 가끔 외딴집에 나와 아들을 남겨둔 채 친구를 따라 다른 동네에 자취를 하면서 3개월이나 별거를 하는 등 방황벽을 보이기도 했으나 남편은 차츰 가정적으로 변모해 가고 있었습니다.
둘째 아들을 순산한 새벽 시골 의사의 진찰로는 병명도 모르는 병으로 아기의 생명선은 점점 약해지는 것이었습니다.
누렇게 황달을 일으키며 젖도 먹지 않은 채 신음하고 있었읍니다. 대구 대학병원에 입원시켜 진찰을 받으며 황달 중증에 걸린 아기 몸 속의 피와 RH-O형의 혈액을 모두 바꿔 넣어야 살리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학병원이나 혈액은행에 알아봐도 이 희귀한 피를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기가 태어난 지 8일째 XX일보 전경화 문화부장님의 중재로 미군들의 파월 장병용 헌혈 속에 단 한 병이 있는 것을 서울에서 수송해 올 수 있었습니다. 우리 부부는 미군들의 인류애와 언론 기관에 감격해서 울었습니다. 그러나 수혈이 늦어 아기는 귀머거리요 벙어리가 되었고 5분마다 뇌에 통증이 와서 그 고통스러운 울음은 차마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남편은 한국사회사업대학에 가서 특수 교육에 대한 책자를 얻어 밤 새워 간호했으나 태어난 지 열달 만에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그 후 남편은 장학사 중원 발령에 추천을 받았으나 배경이 없어 떨어졌다고 믿고는 교직을 떠나 서울에 조그만 사무실을 얻어 광고 대행사를 차렸습니다.
나도 사표를 내고 시골집을 정리한 것과 퇴직금으로 용산 동부이촌동에 12평짜리 아파트를 마련해서 남편과 합류했습니다.
그러나 남편은 너무 호인형으로 선의로만 타인을 대하다 억울한 일만 계속 당했읍니다. 보증서를 안 받고 채용한 사원들이 광고료를 횡령해서 잠적했던 것입니다. 설상가상 격으로 광화문에 사무실이 있고 자가용을 타고 다니는 남편의 제자 C에게도 사기를 당해 부채는 늘어만 갔습니다.
실패했다는 소문은 빨라 채권자들이 집으로 몰려왔고 나는 할 수 없이 아파트를 팔아 빚을 청산하고 불광동에 전셋방으로 옮겨 앉았습니다.
우리는 빚과 굶주림과 배신 당한 연속적인 몰락 현상으로 집단 자살이라도 해 버리고 싶도록 참상에 빠졌습니다. 게다가 어느 새벽 갑작스럽게 우리의 단 하나뿐인 외아들이 가사 상태에 빠져들어 남편과 나는 간신히 이웃집에서 돈을 꾸어 허겁지겁 세브란스병원에 입원을 시켰습니다. 진단 결과는 수면제 복용과 영양실조로 오는 팔 다리 뇌ㆍ눈이 상해서 앞으로는 정상아와는 학습 능력을 맞출 수 없을 테니 정신박약아 학교에 보내라고 추천서까지 써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국민학교 3학년에 계속 머물러 교육시킨 과정을 전문가와 계속 체크한 결과 정상아 학교에서 공부시켜도 되겠다는 담당 의사의 재진단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남편은 가족을 부양하고 책임지는 일은 커녕 처녀에게 재혼한다고 선언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나는 다시 생활 전선에 나섰습니다. 3일간 가족계획 강습을 받고 경기도에 배치되어 상공회의소 경기도청 농촌진흥청 등 직장 순례와 안양의 기업체와 향토예비군을 찾아 가족계획에 관한 지도원이 되었고 화재보험 외무와 수금을 하면서도 평화시장에 드나들며 양말이며 아동복을 도매하여「또순 여사」「구두쇠 주임」이란 별명을 얻기도 했습니다.
이제 이백만 원짜리 15평되는 아파트도 마련했습니다.
남편과 헤어진 지 넉달 후 어느 일요일 남편은 세탁할 헌 보따리를 들고 아파트로 찾아왔습니다. 아들은 어쩔 줄 모르고 뛸 듯이 기뻐하면서 엄마는 왜 반갑게 인사도 하지 않느냐고 성화였습니다.
나는 초췌해진 남편을 보니 죄스럽고 가여워서 부둥켜 안고 울먹이고 싶었습니다. 그날 우리 부부는 서로 심했던 점과 과오를 사과하고 뜨거운 포옹으로 지난 달 잘못된 모든 것을 사랑이라는 용광로에 넣어 말끔히 용해시키고 합류했습니다. 女家長이란 칭호를 내게 붙여준 사람은 15년 전 신혼때 바로 그이였습니다.
남편이 직장에 있을 때나 실업 중이건 간에 가정 경제를 주도해 온 나에게 달갑지 않지만 밉지도 않은 칭호입니다. 그러나 남편이 적당한 보수의 취업이 되면 나는 내가 갖고 있는 가장이란 이름을 환희에 찬 얼굴로 반납하고 남편이 하루 속히 패기와 실천력을 보일 수 있는 날이 오기를 손 꼽아 손 꼽아 기다립니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