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혜는 한 달 남짓 전의 옥중에서 순교한 유세시리아의 둘째요 정하상과는 남매 간이다.
1800년 5월에 박해를 피하여 부친이 온 집안 식구를 데리고 고향인 廣州 마현을 떠나 서울로 피신해 왔을 때 엘리사벳의 나이 겨우 네 살이었다. 서울에 와서 엘리사벳은 모친과 그리고 두 살 위의 오라버니 하상과 한가지로 주문모 신부에게 영세하였다.
다음 해 신유박해 때 일가가 다 잡혔으나 아버지와 이복 오라버니 철상만 순교하고 그 밖의 식구들은 모두 놓였다. 놓이긴 했으나 이미 가산은 몰수된 지라 그들은 하는 수 없이 고향으로 다시 돌아와 숙부의 집에 붙여 사는 길밖에 없었다. 이처럼 엘리사벳에게는 아주 어려서부터 모진 시련과 고난이 잇따랐으니 옥 문을 나서는 여섯살의 엘리사벳의 앞에는 또 다른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가난과 비참이요 추위와 굶주림이었다. 그러나 그는 모친의 모범을 따라 시련 가운데서도 그의 신앙을 보존할 줄 알았다.
그리고 어느 사이에 빈궁한 생활에도 익숙되었을 뿐더러 도리어 가난을 딛고 용감히 일어나 바느질과 길쌈으로 생계를 도모하기 시작했다. 이와같은 그의 착하고 아름다운 표양은 패가망신의 원인이 되었고 천주를 저주하고 천주교를 적대시하여 마지않던 친척들에게도 감동을 주어 7년 안에 그들 친척 중 5ㆍ6명이 다시 천주를 믿게 되었다.
가난보다 더 쓰라린 것은 이별일 것이다. 마재로 피신하여 온 지 얼마 안 되어 엘리사벳은 사랑하는 언니를 잃었다. 열여덟 살 되던 해에는 오라버니 하상도 집에 남아 있을 수 없어 서울로 떠나 버렸다. 홀로 남은 모녀는 이제 가난만이 아니오 외로움마저 참아내야 했다.
그러는 동안 북경 주교의 분부도 있고 해서 하상이 돌아와 모친과 동생을 데리고 충청도로 내려가 교우지방에 정착하였다. 오래간만에 일가가 다시 한 곳에 모이게 되니 그들은 같이 교리를 배우고 극기하는 공부를 더욱 부지런히 하였다. 그러나 미구에 이 지방에도 박해의 선풍이 일자 그들은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엘리사벳은 아주 총명하였고 어려서부터 의지가 강했다. 비록 친척일지라도 남자를 똑바로 쳐다보는 일이 없을 만큼 세심적이었다고 한다. 어쨌든 엘리사벳은 일찍부터 동정을 지킬 결심을 하고 용감히 살아오던 중 30세가 되었을 때 급작히 맹렬한 유혹에 빠졌다.『守貞하는 것이 매우 어려우니 내가 평탄한 길로 간다 하여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이렇게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점점 심해가는 이러한 생각과 그칠 줄 모르는 정욕의 공격에 대항하여 엘리사벳은 2년 동안 엄격한 금욕생활로 투쟁하여 마침내 승리를 거두고 영육 간의 평화를 되찾게 되었다.
늘 선교사의 입국을 간구하여 마지않던 엘리사벳이 네 차례에 걸쳐 주교와 신부를 직접 자기 집에 모시게 되니 그의 기뻐하고 감사하는 모습은 이루 형용키 어려운 것이었다. 주교와 신부를 정성으로 봉사하는 한편 교우들을 가르쳐 성사를 타당히 받게 하였다.
주교도『엘리사벳은 참으로 여회장을 할 수 있어』하고 그를 높이 평가했다고 한다.
박해가 치열해지자 그에게는『치명이 내게 과분한 것이 아닐까』하는 두려움이 앞섰다. 조용히 순교는 준비하면서 동시에 옥중 교우들에게 음식과 옷을 마련하여 주고 가난한 자와 병자를 찾아 위로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결국 6월 9일 유다스 김여상이가 보낸 포졸에게 일가가 모두 붙잡혔다. 포도청의 종사관이 엘리사벳을 신문하였다.『네 남편이 어디 있느냐』『본시 출가하지 않았습니다』『나와 같은 화를 입은 집안의 계집을 누가 아내로 맞아드리려 하겠습니까』다음은 포장이 직접 아래와 같이 신문하는 것이었다.『네가 천주학을 하느냐』『과연합니다』『누구에게 배웠느냐』『어려서부터 모친에게 배웠습니다』『背主하여라』『背主는 못하겠습니다』『네 오라비는 죽으려 하지만 너는 한 말만 하면 모친과 함께 살게 될 것이다』『여기서 나가 살려면 천주를 배반해야 할 것이니 그렇게는 할 수 없습니다』백방으로 배교를 유도해 왔으나 엘리사벳은 종시 굴복하지 않았다. 문초 때마다 태장 50도씩 도합 320도를 맞았다. 이때 엘리사벳은『주 성모께서 나 같이 보잘 것 없는 것을 특별히 보존하여 주셨다가 이제 오 주 예수께서 받으신 고통의 만분의 일이나마 깨닫게 하시니 달게 참아 받겠다』고 다짐하는 것이었다. 10월 초 2일에 형조로 옮겨져 또 6차의 신문 끝에 사형이 선고되었다. 옥에 있으면서 늘 동료들을 격려하고 위로하였으며 옥에 갇히기 전에도 그러하였지만 옥에 갇힌 후에는 동료들을 더욱 성실히 보살폈으니 외부와의 연락에서 오는 위험을 무릅쓰고 세 곳에 갇혀 있는 교우들의 의식을돌보았다.
엘리사벳은 사형 터로 떠나면서 옥중 교우들에게 흉년으로 살아갈 길이 막연한 교우들을 특별히 기구 가운데 기억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
이처럼 그는 가난하고 고통 받는 이들에 대한 일을 죽는 순간까지 심각하게 생각했다.
수레 위에 매달려서도 기구와 묵상을 그치지 않았다. 형장에 이르러 칼을 받고 동정과 순교로 이중의 월계관을 차지하니 때의 그의 나이 43세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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