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이 스물한 살 아직 어린 나이에 이곳 해남의 김씨 가문 종부로 시집 온 지 어언 25년입니다.
남편은 서울 S대 음대 출신으로 글과 서화에도 취미가 있는 7남매의 종손이었습니다.
결혼 초에는 시할머니를 모시고 비교적 행복한 나날을 보냈으며 더욱이 강진 군수로 적지에 나가 계신 시아버님께서 집에 오실 때마다 큰 선물을 내리시어「시아버지 사랑은 며느리」란 말을 체험하기도 했습니다.
시부모님의 이러한 자상하신 보살핌에 비해 남편은 집안일보다 자신의 취미생활에 더욱 몰입하여서 재정난의 지방신문을 발행한다는 이유로 자주 외박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는 중에 나는 다섯 아이를 두게 되었습니다.
도중에 애들 학업을 중단해야 하는 불행이 없기를 기도하며 사실, 그럴 가능성이 농후한 가운데 나는 쉴새없이 농사일에 전념했습니다.
시할머님이 돌아가시자 시아버님이 중풍으로 쓰러지셨습니다.
병석의 시아버님은 하루면 스무 번도 더 나를 찾으셨고 설상가상으로 시어머님께서도 대장염으로 자리에 누우시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방광염이 병발한 후로는 고무 호스를 늘 소독해서 글리세린을 들고 서 있어야 했습니다. 시어머님께서는 병석에 누워 계시지만 살림살이 하나에서 백까지를 관여하시어 터무니 없는 오해로 불호령을 내리시고 이윽고는 탄식과 통곡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게 하시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 무렵 시름시름 앓던 나는 위궤양이라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죽을 먹어도 소화가 안 되더니 며칠 후엔 물을 먹어도 다 토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몸은 말라서 가눌 수도 없는 채로 모진 살림살이를 하며 투병을 계속 했습니다.
그러는 중에 첫째 아이에 이어 둘째 아이가 서울 S대에 합격을 하게 되고 셋째가 고 1, 넷째가 여중 2년 막내가 국민학교 5학년으로 올라섰습니다.
이렇게 되면 첫째와 둘째의 대학 등록금을 마련할 길이 막연했습니다.
남편과 나는 온갖 지혜를 짜 보았습니다만 뾰죽한 수가 없었습니다.
전답을 더 축낼 수도 없고 계책도 없이 빚을 낼 수도 없었습니다.
나는 예나 지금이나 가산을 기울이며 교육을 시키는 허욕에는 반대합니다.
그러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이들이 모두 출중한 성적과 특별한 향학열을 갖고 배우고자 하니 부모로서 최선을 다해 길을 열어 주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입니다.
답답한 나날을 보내고 있던 어느날 진해의 해병 훈련소에서 한 통의 편지가 날아왔습니다.
첫째 애가 대학에 휴학계를 내고 지원 입대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엄마가 한꺼번에 대학을 둘씩이나 보낼 수는 없잖습니까. 저는 군대에 다녀와서도 공부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걱정인 것은 엄마의 병환입니다. 좋은 약 잡수시고 빨리 회복하시는 것만이 제 소원입니다』
남편과 아이들의 도움으로 건강을 회복하는 나는 뭔가 새로운 일을 해서 영농비와 식량과 교육비를 마련해야겠다고 꿈틀거리고 있는데 마치 부르기라도 한 듯 군청에서 여자 지도원이 찾아왔습니다.
새로운 영농법과 소득 증대 사업을 위해 수원의 새마을 연수원에서 교육을 받으라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남편과 아이들에게 시부모님 시중과 집안 일을 맡기고 여성반 제2기생으로 입학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일주일 간의 교육이 끝난 뒤 나는 새마을 부녀회 총무로서 다른 군·읍과 접촉을 하면서 기술 지도를 받았습니다. 우리 동네에는 못이 있어서 오리가 잘 자라고 부지런만 하면 사료도 얼마든지 구할 수 있는 조건이어서 우리는 곧 닭 3백 수 오리 3백 수의 알을 받아 팔 수가 있었습니다. 이렇듯 몸은 피로하나 안정 속에서 고된 줄 모르고 살고 있을 때 군대에 간 첫째 아이 일로 헌병대에 출두하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우리 내외가 정신없이 헌병대로 달려가 보니 첫째애는 수감되어 있었습니다.
평소 성질이 거친 부하가 부대를 무단 이탈해서 총기를 가지고 난동을 부렸다는 것이었습니다.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었지만 첫째애가 한 번 한 꾸중에 앙심을 품고는 심한 기합 때문에 일을 저질렀다고 진술한 모양이었습니다.
인정 많고 담배와 술도 모르던 첫째애가 수감되어 있는 걸 보니 우리 내외의 가슴은 찢어질 듯했습니다.
법은 공정하여 아들애는 57일 간의 복역 끝에 누명을 벗고 제대했습니다.
무엇보다 기쁜 것은 시어머님의 병환에 차도가 보이는 일입니다.
그리고 나이 50세에 신춘문예에 응모한 남편의 희곡「타령」이 당선된 일입니다. 그 후 모영화사에서는 시나리오를 외뢰해 와 남편을 더없이 행복하게 했습니다. 이제 내게 남은 일은 아이들의 학비를 조달하는 일입니다.
손가락 마디가 아무리 굵어지고 몸이 피곤해질지라도 우리 집안의 희망인 닭과 오리를 정성스럽게 보살필 것이며 과학적인 영농 방법의 연구도 계속할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어려운 환경에서 촌부 노릇 자부 노릇 아내 노릇 어미 노릇 그리고 층층시하의 고초를 겪는 많은 분들에게 한 번 주어진 우리들의 일생을 정성스럽게 살자고 한마디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