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바라는 본시 양근 조동섬 가문의 후손이요 아버지는 군방지거라 불리었다고 하나 동섬과 방지거의 항렬은 분명하지가 않다. 발바라가 스무 살 되던 해에 일어난 신유년의 풍파로 아버지가 순교하였다. 이때 동섬 유스띠노도 함경도 무산으로 유배되었고 동섬의 아들 도마는 양근군 옥에서 옥사하였다. 그 후 3년 양근에서는 다시 동섬의 일가인 조숙이가 참수 치명하였다고 한다.
발바라의 할아버지는 박해 때 성물을 땅에 묻으며 발바라에게 그 사실을 알려 주었는데 당시 증언에 의하면 박해가 지나자 발바라는 위험을 무릅쓰고 성물을 파내어 잘 말려 소중히 간직해 두었다가 서울로 갖고 올라갔다고 전해진다.
발바라는 열여섯 살에 역시 열심하고 가문이 좋은 남세바스띠아노에게 출가하였다. 결혼한 지 4년 만에 한 아들을 낳았으나 곧 잃었고 때마침 일어난 신유박해로 남편도 잡히어 경상도 단성으로 유배되었다.
남편이 귀양가게 되자 발바라는 집에 혼자 남아 있을 수 없어서 부득이 경기도 利川의 친정으로 돌아와 어린 동생과 함께 지냈다. 여기서 발바라는 실로 형용키 어려운 여러 가지 위험과 허다한 시련과 고초를 겪어야 했다. 한편 발바라의 신앙생활도 냉담자와 별로 다를 바 없었다.
자신의 교리 지식이 아직 충분하지 못한데다 박해로 인하여 자연 교우들과의 접촉도 끊겼기 때문이다. 이러한 냉담 상태는 10여년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1811년 그의 나이 30세가 되었을 때 발바라는 다행히 서울의 한 교우 일가 집으로 와서 거처하게 됨으로써 점차 교리를 깨우치고 열심 수계하고자 신심생활에 전념하고 온갖 선업에 전력을 기울였다.
무엇보다 이 나라에 하루 속히 선교사를 모시려는 열망에서 외가의 친척인 정바오로가 경영하는 선교사 영접 계획이 실현되도록 힘껏 도왔으며 열심히 벌어 바오로의 북경 여비를 충당하였다.
1832년 유배지에서 돌아온 남편도 정바오로의 일을 도와 이듬해에는 중국인 유 신부를 입국시키는 데 성공했다. 발바라는 유 신부를 자기 집에모시고 남편과 한가지로 신부에게 정성껏 복사하였고 3년 후 유 신부가 본국으로 돌아가게 되자 따로 집을 마련하고 딸 하나를 데리고 지냈다.
여기서도 가끔 주교와 신부를 모셔 와 공소를 치루게 하였다.
발바라는 기구와 묵상을 부지런히 하였다. 그리고 사람들 앞에서늘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만일 군란이 일어나면 죽을 터이니 치명을 잘 준비하여 천주의 영광을 드러내고 우리 영혼을 구하자』고.
김방지거는 남세바스띠아노의 집을 방문했을 때 받은 인상을 이렇게 회고한다.『내가 한 번 서울에 왔을 때 세바스띠아노의 집에 초대받아 간 적이 있다. 이때 나는 발바라가 어떻게 이웃을 권면하고 수많은 외교인을 입교시키며 수계를 열심히 하고 있는가를 목격하였다. 당시 교우들은 다 발바라를 성녀라고 불렀다』
기해년에 박해가 일어나자 남편이 이천으로 피신해 버리니 집에는 발바라 모녀만이 남아 있게 되었다.
이 때 딸의 나이 열다섯이었다.
6월 9일 남편을 체포하러 온 포졸들이 남편 대신 조발바라 모녀를 잡아갔다. 동시에 집에서 많은 성서와 성물이 발각됨으로써 교우의 진상이 여지없이 드러났다.
포장이 발바라에게 주리를 틀게 하고『背主하여라. 그리고 가장이 간 곳과 친척과 동교인을 대라』고 위협하며 무수히 괴롭혔으나 발바라는『背主는 만만코 할 수 없습니다. 가장의 간 곳은 저도 모릅니다』고 대답하며 굽히지 않으므로 그를 옥에 가두게 하였다. 하옥된 후에도 군졸들이 멋대로 끌어내어 사사로히 학대하기를 20여차례나 하였다.
그 사이에 남편도 이천에서 잡혀 서울로 압송되어 왔다. 그러나 불과 10일 만인 8월 19일 아내에게『비록 동일동사는 못할지라도 동지동사는 하자』는 유언을 남기고 먼저 순교의 영예를 차지하였다.
발바라는 포청에서 다섯 번의 문초를 받는 중 주뢰 한 번과 태장 도합 180도를 맞았다. 몸에서 고름이 계속 흐르고 온 몸이 상처 투성이어서 이제는 더 이상 형벌을 가할 수 있는 곳이 없었다. 그러나 형조로 이송된 후에도 세 차례의 곤장을 맞고서야 비로소 고대하던 사형 선고를 받았다. 옥에 있은지 근 6개월 드디어 11월 24일 동료 5인과 함께『동지동사나 하자』는 남편의 예언대로 서소문 밖 형장에서 그의 순교를 완수함으로써 남편과 한가지로 순교의 월계관과 복자의 영예를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때에 발바라의 나이 58세였다. 형장으로 향하는 마당에서 육정을 끊기 어려워 눈물을 흘리며 동정하여 마지않는 옥중의 동료 교우들을 보고 발바라는 그들을 좋은 말로 위로하며 그들의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그러나『아직 치명할 시간이 멀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발바라는 태연히 자리에 누워 조용히 잠을 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형장으로 떠날 시간이 되자 일어나 용약하며 형장으로 향했다. 이러한 상황은 그의 마음에 조그마한 두려움도 없었을 뿐더러 도리어 평화에 가득 차 있었음을 잘 말해 주는 것이다. (계속)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