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개인적으로 더 잘 산다는 것이 가능한 것이라면 우리나라가 더 잘 사는 것도 가능한 것이고 우리나라가 더 잘 사는 것이 가능하다면 이 세계가 더 잘 사는 것도 가능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하느님의 뜻을 실현시킬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더 잘 산다는 것은 어떤 모양으로든지 과거와는 달라진 것을 말합니다. 그것이 더 좋은 모습으로 바뀐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과거에 잘못 산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는「바뀌는」것에 대하여 일종의 금기의식(禁忌意識) 같은 것이 우리의 내면에 있어 가지고 누구도 그것을 용납하지 못하도록 통제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이러한 불변애호적인 취향은 우리의 생활 전 영역에 걸쳐 나타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사(移舍) 가는 것을 아주 싫어하고 무슨 변화가 일어나면 그것을 곧장 불행과 연결 지워 생각하는 경향 등이 그것입니다. 편지 첫 머리에 묻는 안부말에도『별고 없습니까?』로 시작하여『무고하기를 빕니다』로 끝내는데 이것은 결국 철저하게 현상 유지를 원하는 취향에서 나온 것으로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하기야 변화 가운데 나쁜 변화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나 나쁜 변화가 더 잘 산다는 것은 성립이되지 않으니까 가난하던 사람이 넉넉하게 산다든가 병약자가 건강을 회복했다든가 하는 따위의 변화를 가지고 우리는 잘 사는 변화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학생들에게 이제부터는 편지의 첫 머리에『얼마나 많이 달라졌습니까?』또는『얼마나 크게 생활이 향상되었습니까?』로 표현하고 끝맺음에도『더 큰 변화를 빕니다』나 또는 이것은 다만 굶주려 허덕이는 사람에게 물 한 모금을 주는 격이라고나 할까요? 굶주림을 해소하기 위하여는 아직도 많은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나는 인간의 소망으로서 행복을 전제했습니다. 그리고 그 행복은 인생의 맛들임에서 찾을 수 있고 더 깊이 맛봄에서 찾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행복은 혼자서만 획득할 수 있는 것이거나 혼자서만 누리는 것이 아니란 뜻에서「행복의 사회성」즉 남과 더불어 행복함이라야 한다고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나는 우리는 끊임없이「더 잘 사는 인생」을 추구해야 하며 그것은 항상 비교적으로 즉 과거보다 더 잘 살고 현재보다 더 잘 사는 미래의 창조라야 한다고 설명했습니다.
선태군이나 진희양은 지금 한창 인생의 의미에 대해서 회의를 느끼고 있는 시기라서 조금난 인생론에도 큰 호감을 갖게 되지만 때로는 위대한 철학에도 쉽게『아니다』할 수 있습니다. 독자 여러분도 이들 젊은이들의 진리에의 정열을 격려해 주실 줄 믿으며 다음 화제 II에서는 이러한 우리의 소망을 실현하는 한 가지 큰 인간적 기업으로 교육에 관해서 이야기하기로 하겠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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