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교사들의 과거와 현재는 많이 변했다. 제2차「바티깐」공의회 이후 교회 내 평신도 사도직 역할의 재인식에 따라 대부분의 도시 본당에서 자취를 감춘 전교사는 시골 본당과 공소에 산재, 그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전교는 신부ㆍ수녀ㆍ전교사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는 이제 없다. 각자가 세상에서 전교사가 되어야 하는 오늘날 일선 교사들의 체험기를 통해 우리들의 자세를 가늠해 본다. (편집자註)
12년 전 어느 겨울 밤. 그날은 나의 생애에 있어 가장 부끄러웠던 날이며 또한 가장 큰 변화를 불러일으킨 날이기도 하다.
가르침의 소명에 불리운 자에게는 때때로 독선과 위선의 함정이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본당 신부 사무실에 소위 지성인 구도자가 찾아왔다.『신부님 저는 오래 전부터 가톨릭에 매력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신앙에 도움이 되는 말씀을 해 주십시요』
이 말에 나는 벌써부터 가르치는 자의 속된 본능이 작용하여 신부님의 멋진 해설을 듣고 싶은 충동에 차 있었다.
헌데 기대와는 달리 신부님의 대화는 피상적이었고 상대방은 충족감이 없어 보였다.
초조하게 분위기를 주시하고 있던 나는 그만 내 경솔을 폭발하고야 말았다.
화자를 가로맡아 장장 두 시간에 걸쳐 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그의 속성과 인간론 그리고 신과 인간관계 구세론과 교회론 그리고는 종말론에 이르기까지 의기양양하게 스콜라적 이론을 전개해 나갔다.
설명이 다 끝나자 젖을 실컷 먹여준 어머니다운 긍지와 흐뭇함으로 나의 얼굴은 상기되었고 상대는『참 좋은 말씀 들었습니다』하고 예를 보내고 있다.
함께 듣고 있던 동료들까지도 손님이 돌아간 후에『자네의 해박한 교리 지식에 감복하였네』라고 찬사을 보내 주었다. 그날 밤 나는 주께 감사와 기쁨의 찬송을 드리고 편히 잤다.
이튿날 아침-. 신부님을 대면할 때까지도 나는 당당하고 유능한 전교사였다. 그러나 이것이 내게 치명적인 함정일 줄이야! 아침 인사를 드리자 그는 조용하고도 조소 섞인 음성으로『어제는 정말 놀랐습니다. 당신은 항상 그런 식으로 신앙을 가르쳐 왔습니까?』예상 밖의 비난에 반감마저 생겨『왜 제가 잘못되었습니까』하고 항변하자 나를 앉게 한 후 심각한 표정을 물어 왔다.
『당신은 성경을 믿습니까?』『그렇다면 매일 성경을 읽습니까』『매일 읽지는 않지만 중히 여깁니다』그러자 그는 마태오복음 4장을 폈다.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4절)이라 하셨는데 성경을 믿고 전교사로 사노라 자부할 수 있습니까?』
나의 허를 찌른 그는 다시 마태오복음 13장 31절을 폈다.『하늘나라는 겨자씨와 같은 것이라 하십니다. 신앙의 나무는 단 몇 시간에 자라나는 그런 것은 아닙니다.
무수한 시련과 절규 속에서 싹이 트고 줄기가 나고 꽃이 피는 것이 아닐까요? 당신은 그런 신의(神意)에 따라 생명의 나무를 가꾸는 일꾼으로 불리운 것입니다. 물론 당신 혼자만의 잘못은 아니지만 어느 신학의 일개 사상을 소화도 시키지 않고 수학 공식처럼 나열하는 앵무새 같은 재주로는 신앙이란 위대한 생명력을 결코 전달할 수 없습니다.』그의 말은 사뭇 질책으로 변해 갔다.『신앙이란 두뇌에서 자라는 것이 아니라 마음 속에서 자라는 것입니다. 불기 없는 스토브가 어찌 겉장식만 가지고 추위에 언 이웃을 덥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 나는 앵무새에 지나지 않는다. 설 익은 지식 따위를 배달하는 앵무새였다. 그것도 배달자의 순박성에서 벗어나 자기 재주에 심취한 오만자로서. 일 순간에 처참하고 초라해진 나를 보았다. 그렇게도 알뜰히 닦고 쌓아 왔던 상아탑이 모래성일 줄이야.
그날 밤 난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눈을 돌려 인간 안에 내재하시는 하느님의 생명력을 구상화 해줄 수 있는 능력을 주십하고 빌고 또 빌었다.
그 후『저 회장은 두 시간 안에 신자 만드는 사람이야』하는 농이 이 경솔한 앵무새를 찌르는 사랑의 가시가 되어 전교사로서의 나를 눈 뜨게 했다.
(계속)
◇일선 전교사들의 많은 투고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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