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농촌에서 태어나 고학과 장학금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한 나는 불행한 이들을 위해 한 생애를 바치리라 마음 먹고 한국사회사업대학 특수교육학과에 지원서를 냈습니다.
『야 이느마야 뭐 할 짓이 없어 벙어리를 가르치는 선생이 될라카노?』
일언지하에 반대 의사를 표하시던 아버지께서도 결국 내 굳은 뜻에 동조해 주셨습니다.
64년 봄이었어요.
대학 졸업을 두어 달 앞두고 학장님이 내게 일본 유학을 권유해 오셨습니다. 공부가 끝나면 이 학교에서 함께 일하자는 말씀이었어요.
며칠을 생각한 결과 특수교육 학도를 길러내는 교수도 좋지만 더욱 시급한 문제가 직접 농아자를 돌보는 일이라고 결론 짓고 그 해 봄, 수원 농아고등공민학교 교사로 부임해 갔습니다.
물론 보수를 바라고 이 길에 나섰던 것은 아니나 첫날부터 가난한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학교는 정식 인가가 안 난 터라 월급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고 학년이 다른 농아들을 한 교실에 수용하고 수업하기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어요.
우리는 조그만 기숙사 방에서 함께 생활하며 약간의 고구마로 끼니를 때우기도 했습니다.
고맙게도 수원시 산하 70여개의 기관에서 매달 천 원씩 보내 주셔서 의식을 해결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공부해야 할 교실이 필요했습니다. 교장 선생님과 아동들과 나는 삼위일체가 되어 흙벽돌을 찍어 냈고 교실이 완공될 무렵 장마비는 보름이나 퍼부었습니다.
한꺼번에 무너져 버린 우리들의 교실! 그러나 교실 벽은 다시 세워 올려졌고 나는 고향의 부모님을 설득해서 지붕을 씌울 자금을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나는 인가를 받기 위해 여러 번 서울을 왕래했습니다. 어떤 때는 차비가 없어서 서울까지 걸어간 적도 있었지요. 그래도 일이나 순조로이 되었으면 다행이련만 흙벽돌로 지은 건물이라 인가가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문교부 당직자를 붙들고 호소하다 차 시간이 늦어져 서울역 대합실에서 밤을 지새우기도 했습니다.
64년 12월 10일, 그렇게 애타게 기다리던 인가가 나오던 날 우리는 얼싸안고 울었습니다. 정말 벅찬 환희의 눈물이었습니다.
65년 겨울, 나는 방학을 맞아 고향인 안동으로 내려가 친구 규철이를 만났습니다. 고향의 농아자 실태를 조사하기 위해서였지요. 그런데 놀라운 것은 안동시를 비롯한 인접 13개 군의 취학 대상 농아자만도 무려 6백명에 달하는 엄청난 숫자가 나온 것이었습니다.
나는 친구와 함께 농아자를 위한 보금자리를 안동에 마련하자는 결론을 얻고 수원으로 돌아왔습니다.
만류하시는 교장 선생님과 서툰 발음으로『선생님 가지 마세요』하며 떼 지어 오는 아동들을 뒤로 하고 나는 다시 고향으로 내려왔습니다.
그러나 부모님과 친지들의 강력한 반대와 동네 사람들의 비웃음이 나 자신을 주춤하게 했고 좌절감에 빠져 들게 했습니다.
이때 나는 규철의 편지를 받았습니다.『우리의 꿈과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감을 망각하지 말자. 강철은 달구면 달굴수록 더 강해진다 카더라』나는 규철의 편지를 잔뜩 움켜잡고 다시 일어섰습니다.
시장님의 배려로 안동시 평화동 산 4의 1번지에 터를 잡고 돌 투성이의 산 능선을 고르는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설립을 서두르던 규철이가 입대했으므로 나는 혼자서 새벽부터 땅거미가 질 때까지 땅을 파야 했습니다. 어느날 이글거리는 태양에 못 이겨 지쳐 쓰러져 있을 때 어머니가 달려와 나를 일으키고 있었습니다.
『연창이 이느마야 제발 미친 짓 그만 하고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가재이』
정말로 나는 불효막심한 자식이었고 그때의 난 미쳐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며칠 후 어머니와 마을 청년의 도움으로 활기 띤 작업을 하고 있을 때 산림계 직원이 나와 무허가로 산을 깎았으니 구속시키겠다는 것이었어요. 결국 사회문제가 되어 기자들이 몰려 왔고 나는 이 학교를 세우려는 취지를 말했습니다. 불법으로 국유지를 점유한 나를 기사화하려던 기자들은 오히려 나를 돕자는 기사로 바꿔 쓰게 된 것입니다. 그분들이 각 기관을 찾아가 협조를 구한 결과 학교 짓는 일은 무난히 해결되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작은 운동장과 흙벽돌의 교실과 기숙사가 완공되었고 권우식씨의 인쇄소 제공으로 재단이 구성되어 66년 12월 5일 드디어 문교부의 인가를 얻게 되었습니다.
이듬해 봄엔 2학급 30명을 입학시켰으나 월사금은 고사하고 기숙사비도 낼 수 없는 부모들이 많았기 때문에 운영난에 부딪히게 되었습니다. 나는 아동들과 함께 작업을 하기로 했습니다.
손쉬운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성인이 된 뒤에도 자활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하는 데 역점을 두고 인쇄반ㆍ철사 제품반ㆍ비닐 제품반ㆍ수예반으로 나누어 재능에 맞는 일을 지도했습니다. 그리고 그 이익금으로 의식주와 학비를 해결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말 못하고 듣지 못하는 대신 놀라우리 만큼 예민한 이들은 기술 습득도 빠른 시간 내에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훌륭한 의사가 될래요. 그래서 벙어리가 말할 수 있게 하겠어요』
너무나도 순진하고 뼈에 사무친 이 작심. 말 못하는 아픔과 비애가 이런 집념으로 변한 것입니다. 나의 작은 이 힘, 차라리 이건 없어도 될지 모릅니다. 차라리 어느 사람의 말처럼 돈 많은 사람이 나와서 했으면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때까지 가만히 앉아 기다릴 순 없는 게 우리네 현실이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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