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덕은 성품이 온화하고 어려서부터 숙성해 보였다. 가문은 훌륭했으나 천주교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영덕의 가족이 천주교 얘기를 처음으로 듣게 된 것은 그의 외할머니로부터였다. 원래 천주교인인 외할머니는 의지할 데가 없어서 딸의 집에 와서 붙여 지내게 되었다. 그의 권고로 영덕 형제와 어머니 이렇게 세 모녀가 천주교로 개종하게 되었다.
이해 세 모녀는 열심히 믿으려 했으나 아버지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쳤다. 게다가 집이 몹시 가난하여 거처할 집도 없고 보니 그들의 참혹한 형상은 이루 형용키 어려운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러한 곤궁을 감수하며 열심히 수계하였다. 미구에 외할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하루는 아버지가 지방으로 여행 간 기회를 이용하여 영덕은 동생과 함께 집을 나와 영세하였다. 이때 영덕은 막달레나 그리고 동생은 마리아라는 본명을 받았다. 막달레나가 스무 살이 되었을 때 그의 아버지는 그를 한 외교인에게 출가시키려 했다. 그러나 막달레나는 이미 수정할 결심을 한데다 이제는 영세까지 하였으므로 그렇게 할 수가 없어서 병을 핑계하고 거절하였다. 이에 아버지로부터의 공격과 학대는 일일이 서술할수 없을 만큼 날로 심해졌다.
형세가 다급해지자 막달레나는 자기 손가락을 베어 혈서를 써서 아버지에게 드렸다. 혈서도 아버지를 감동시켜 딸의 결혼을 단념케 하지는 못했다. 부녀 간의 투쟁은 이렇게 7년간 계속되었다.
1838년 막달레나의 나이 27세 결혼을 피할 수 있는 아무런 묘책도 발견할 수 없게 되자 마침내 막달레나는 집에서 뛰쳐나와 피신할 허락을 주교에게 청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주교의 대답은 부정적이었다.『그것은 매우 중대한 문제이다. 집에 남아 있는 것이 낫다. 하지만 뜻을 굽혀서는 안 된다』고.
사세는 점점 급박해졌고 세 모녀는 더 이상 견디어 낼 수 없어서 집에 남아 있으라는 주교의 분부에도 불구하고 결국 집을 나와 교우집으로 피신하였다. 범 주교는 이 소식을 듣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명령하였다. 그러나 세 모녀는 주교에게 만일 그들이 집으로 돌아간다면 그것은 죽음이나 다를 바 없다고 설명하였다. 주교도 죽음을 면키 어려운 그들의 사정을 이해하고 회장에게 분부하여 그들의 거처를 주선케 하였다. 세 모녀는 새 피신처에서 서로 의지하며 지냈다. 형용키 어려운 극빈 중에서도 그들은 이것을 인내와 즐거움으로 이겨내는 한편 끊임 없는 기도와 묵상과 독서로 종교적 본분을 다하였다.
기해년 박해가 일어났을 때 사실 그들은 피신할 데도 없었지만 이왕이면 치명을 더욱 잘 예비하고저 오로지 치명만을 염두에 두고 성서를 읽으며 그들의 열심을 북돋았다.
결국 음력 5월 포졸이 달려들어 세 모녀 그리고 그들과 동거하던 이가타니나 모녀를 모두 붙잡아 갔다.
이가타리나 모녀는 이미 소개한 바이거니와 어쨌든 기묘하게도 이막달레나의 집안과 똑같은 불행과 곤궁에서 결국 주교의 주선으로 이막달레나의 집에 와서 같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포청으로 끌려 와서 우선 종사관의 신문을 받고 다음 포장 앞에 끌려가 주뢰 한 번과 그 밖의 많은 학대를 받았다. 그러나 이 5명의 증거자의 뜻이 한결같이 굳셈을 보고 그들을 옥에 가두게 하였다. 당시 증인은 그 감옥이 좌포청이었다고 한다.
막 감방으로 들어가려 할 때 포졸 한 명이 이막달레나의 얼굴을 가리운 머리털을 담뱃대로 젖히며『어디 좀 구경하자』고 희롱하였다.
이들과 얼마 동안 옥살이를 같이 하다가 배교하고 나온 유발바라는 당시의 감옥 사정을 이렇게 증언하였다.『나는 이막달레나 형제 등 다섯 명이 내 감방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을 뿐 그 후에 일어난 일은 전혀 모른다. 포청에서의 문초로 나는 닷새 동안 굶주린 끝에 또 염병에 걸려 그만 의식을 잃고 말았다. 이렇게 나는 수 개월 동안 고생하였고 10월에 가서야 병세가 좀 회복되기 시작하자 의식을 되찾았다. 감방에는 이미 이막달레나 형제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사실 유발바라가 의식을 회복했을 때는 이미 이막달레나의 어머니 조발바라 그리고 이가타리나 모녀는 염병으로 옥사하여 먼저 순교의 영예를 차지한 후였다. 비좁은 감방에 사람은 들끓고 삼복더위마저 겹치니 염병이 발병하지 않을 수 없었고 누구나 염병에 전염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막달레나 형제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제 두 딸은 어머니보다 더 긴 시련을 겪어야 했다. 그들의 뜻을 굽히려고 일층 잔악한 문초와 형벌이 가해졌다. 그 밖의 무서운 갈증과 굶주림이 그들의 고난을 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제는 끝까지 용감했다. 5개월 만에 같이 형조로 이송되었다.
형조에서도 형관으로부터 형문 세 차례를 받는 중 곤장을 맞았다. 드디어 사형이 선고되었다. 11월 24일 이막달레나는 동료 6명과 한 가지로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 치명함으로써 동정과 순교의 이중의 영광을 차지하고 천상 배필 앞으로 나아갔다. 나이 28세.
한 달 후에 동생이 언니의 뒤를 따랐다. 형제가 다 복녀가 되었으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어머니는 탈락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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