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다리가 부러지고 사지가 짓찟겨도 그들은 굴하지 않았다. 쏟아지는 흙더미에 산 채로 묻히면서도 그들은 끝내 주님의 이름만을 목이 터져라 불렀다.
순교자들의 주검과 그들이 흘린 붉은 피로 해미천(海美川) 넓은 강과 성 안이 시산혈하를 이루었던 이곳 순교 성지 해미!
이제 님 가진 지 1백여 년의 세월이 흐른 오늘, 순교자들의 거룩한 주검은 해미들 한복판에 우뚝 솟은 순교자 기념탑의 초석이 됐고 나아가서 한국 천주교회의 굳건한 기둥이 됐다.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전국의 청장년들을 모아 축성한 군사적 목적의 이 해미성이 그 숱한 피로 얼룩진 순교사만을 후세에 전하고 있음은 이 무슨 역사의 비극인가?
뒤로는 차령산맥의 준령들 병풍처럼 둘러싸고 앞으로는 해미천을 건너 넓은 해미들을 끼고 앉은 이곳 해미성을 피로 얼룩지게 한 순교사는 1801년 신유대박해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1738년 이승훈이 이 땅에 복음의 씨앗을 뿌린 바로 다음해인 1784년 예산읍 여사동(현 신암면 두곡리)에 살던 남인 학자 이단원이 권일신으로부터 성교의 깊은 도리를 배워 영세를 받음으로써 내포지방(현 흥성ㆍ예산ㆍ당진 서산)에 천주교가 전래됐다.
이단원의 열렬한 전교로 내포지방의 당대 명문 거족이요 학자인 황사영ㆍ이가환ㆍ한이형 등이 영세 입교하자 천주교는 요원의 불길처럼 각 고을마다 전파되고 학자와 양반들이 다투어 입교하게 됐다.
그러나 이 땅에 전파된 복음의 씨앗이 채 뿌리도 내리기 전인 1801년 신유년부터 시작된 전국적인 대박해와 함께 내포지방 신자들도 신교의 자유를 되찾을 때까지 80여년간 인고의 세월을 보내야만 했다.
이조 5백년 간 해미는 내포지방의 군사 요충지로서 진영장이 주둔, 국사법을 처형하던 곳으로 신유박해로부터 병인대교난에 이르기까지 약 1천 명의 선열들이 신앙을 증거하며 순교했다.
높이 5m 연장 1800m의 사적(史蹟) 제116호의 해미성에는 동문 서문 진남문 북문 등 4개의 출입문이 있다.
이 중 진남문은 고관들이 출입하던 곳이고 동문은 소관들의 출입문이었다. 또 서문을 통해서는 죄수들이 출입했고 북문은 처형된 시체를 운반할 때만 썼다.
따라서 국사범인 천주교 신자들은 서문으로만 출입했기에 서문 밖에서 수많은 신자들이 순교했다.
서문 밖에서 남쪽으로 5m 지점의 작은 개울을 덮은 돌다리 위에서 수많은 신자들이 보리 타작하듯 태기쳐 죽음을 당했는데 그들이 흘린 피가 개울을 넘쳐 흘렀다고 전해지고 있다. 지금 이 돌다리는 서산성당으로 옮겨지고 새로 만든 콘크리트 다리 위를 무심한 행인들이 옛일을 아는지 모르는지 바쁜 걸음들을 옮기고 있을 뿐이다.
해미성 구석구석 어디를 가나 순교자들의 피로 얼룩지지 않은 곳이 없다. 진남문 북쪽에 위치한 옥사(獄舍) 터 역시 수많은 순교자들이 장한 최후를 마친 곳이다. 지금은 허물어져 흔적도 찾을 길 없는 옥사 터에는 아직도 한 그루의 호야나무가 당시의 비극을 말해주듯 밑둥이 썩은 채 을씨년스러운 모습을 보이며 서 있다. 당시 관헌들은 옥사 바로 앞에 서 있던 이 나무의 Y자형 가지에 밧줄을 달고, 신자들을 끌어내 목을 달아 처형하기도 하고 나무 줄기에 묶어 놓고 태형을 가하는가 하면 활을 쏘아 죽이는 등 온갖 만행으로 갇혀 있던 교우들을 위협했으나 그들의 마음을돌릴 수는 없었던 것.
지금 그 비극의 가지는 오랜 연륜(年輪)에 못 이겨 썩어 떨어지고 옥사가 섰던 자리엔 해미공소가 들어서서 이 순교 성지를 지키고 있다.
이처럼 돌로 처죽이고 목매 죽이고 혹은 활로 쏴 죽였으나 죽여도 죽여도 굴하지 않고 신자들이 계속 밀려오자 관헌들은 해미성 밖 해미들에 깊은 구덩이를 파고 무더기로 생매장으로 처형했다.
진남문 앞의 해미천(海美川) 건너 강둑 아래 우뚝 솟은 순교자 기념탑 자리가 바로 그 곳.
이곳에서는 한 구덩이에 15~20명씩을 산 채로 묻어 죽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1866년부터 6년 간에 걸쳐 전국적으로 벌어진 병인대박해 때 수많은 신자들이 이곳에서 생매장으로 최후를 마쳤다.
이 사실은 1935년 4월 2일 당시 서산본당 주임 범 신부가 박해 현장 목격자들의 증언에 따라 이곳을 발굴, 고상 묵주 등 유품과 유해를 발굴해냄으로써 확인됐다.
80여년간 계속된 박해 기가네 해미 진영에서의 순교자 수는 약 1천 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이 중 복자 김대건 신부의 조부 김진후(삐오) 이보현(프란치스꼬) 인은민(마르띠노) 유군명(시메온) 박취득(라우렌시오) 박옥규 안정구 민베드로 송중화(요셉) 송여옥(요셉) 손여심 배정모 하발바라 전베드로 등 극히 일부만이 이조실록에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대부분의 순교자들은 자세한 기록이 보존되어 있지 않아 그 명단이나 당시 선열들의 영웅적인 행적들을 찾을 길이 없음은 실로 유감스러운 일이라 하겠다. 이곳에서 순교한 선열들의 수가 1천 명이나 되는데도 아직 단 1명의 복자도 탄생시키지 못하고 있는 후손들의 무능이 안타까울 뿐이다.
하루 속히 사실을 발굴, 선열들의 거룩한 죽음을 영원히 빛낼 시복ㆍ시성운동을 추진하는 일이야말로 우리 후손들에게 부과된 크나큰 숙제라 하겠다.
대전교구는 순교 복자 79위 시복 50주년을 맞은 1975년 10월 24일 이곳에 순교자 기념탑을 세웠다.
높이 16.52m의 이 순교자 기념탑은 꺾어도 꺾어도 꺾이지 않던 순교자들의 장한 기개를 말해 주듯 해미성 앞 넓은 들을 굽어보며 우뚝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기념탑 아래 제단들은 대원군 부친의 사당에 있던 것으로 김장식(다테오)씨가 기증한 것 - . 천주교 대박해의 주인공인 부친을 공경하던 데 쓰던 이 돌이 순교자 기념탑 제단으로 놓인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라고나 할지-찾는 이의 감회를 착잡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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