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교회의 새로운 좌표를 설정했던 제2차「바티깐」공의회가 폐막된 지도 75년으로 10년을 넘어섰다. 그동안 교회는 공의회에서 제시한 쇄신과 대화의 길을 향해 꾸준한 전진을 거듭해 왔다. 본보 지령 1천호를 맞아 공의회 후 10년 동안 무엇이 어떻게 얼마나 달라졌는지를 좌담으로 엮어 봄으로써 한국 교회의새로운 진로를 모색해 보고자 한다. (편집자 註)
◆말씀해 주신 분
▲박성종 (신부ㆍ서울 후암동 주임)
▲오경환 (신부ㆍ가톨릭대 신학부 교수)
◇사회=구중서 (가톨릭출판사 주간)
◇기록ㆍ허종렬 기자
◇일시=1976년 2월 5일 오후 4시
◇장소=CCK 수녀연 사무실
▲具=제2차「바티깐」공의회는 단적으로 말해서 교회가 심각한 변화를 거듭하는 현대 세계에 적응하고 교회 쇄신과 사회 참여를 통해 인류 세계를 구원해야 하는 사명을 재확인하면서 거기에 따르는 원리와 대책을 강구하려는 역사적 거사였다고 봅니다. 먼저 이번 공의회를 열어야 했던 시대적 요청이 무엇인지 오 신부께서 말씀해 주십시오.
▲吳=공의회가 있기 전에 공의회를 열지 않으면 안 되었던 굉장한 힘이 있었습니다. 종교개혁 이후 교회는 항상 공격을 받아 왔으므로 항상 방어 태세를 취해 왔습니다. 특히 프랑스 혁명 이후에는 새로운 사상이 발전했기 때문에 교회사상과 대립이 생겼습니다. 정치적인 혁명을 통해 민주주의와 평등주의가 대두하기 시작했고 제도화하기 시작했으며 사회적으로는 도시와 산업이 발전, 중산층이 팽창하면서 행동의 자유ㆍ언론 집회의 자유ㆍ종교의 자유를 부르짖게 되었으며 과학이 발전하면서 자연 환경을 통제할 수 있는 힘이 굉장히 늘어났습니다. 교회는 이런 새로운 사상과 대립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민주주의보다 군주제도를 옹호했고 평등주의보다 계급주의를 옹호했으며 국가와 종교의 분리를 반대하여 교회는 국가를 지도해야 한다는 입장이었고, 행동의 자유를 통제하고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 새로운 사상을 흡수하자는 운동이 일어났어요. 프랑스 혁명 직후 1829년부터 프랑스와 독일에서 이런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러자 교회는 이를 단죄했습니다.
20세기에 와서 새로운 사상이 또 고개를 들기 시작, 프랑스를 중심으로 아일랜드 이태리 등지로 번져졌습니다. 교회는 다시 이를 단죄했습니다. 또 방어를 한 거지요. 그러다가 제2차 세계대전 후 새로운 사상을 흡수하는 신학자들이 성장하자 교회는 적대 입장에서 빠져 나가려는 태도를 취하게 되었고 그것이 요한 23세의 공의회 소집으로 나타났어요. 제2차「바티깐」공의회는 종교개혁 직후에 열린「트리엔트」공의회나 제1차「바티깐」공의회와는 달리 반대 세력을 단죄하려 하지 않고 대화를 목적으로 했습니다. 또 일방적인 교회의 주장만을 얘기하는 어조를 취하지 않고 사목적이고 다른 교회와 일치하려는 어조가 문헌에 나타나 있습니다. 문헌 통과도 거의 만장일치였어요.
공의회 문헌 16개를 통해 나타난 것을 보면 교회 안에도 민주주의를 어느 정도 도입하려 하고 있습니다. 주교와 평신도에 관한 교령들을 보면 주교와 신부와 평신도에게 상당한 결의권이 주어졌습니다. 수도생활에 관한 교령도 마찬가지고 또 일치교령과 비그리스도교에 관한 교령을 보면 다른 종교에도 상당한 하느님의 은총과 작용이 있다고 인정, 유아독존적인 사고를 버렸고, 종교자유 선언도 처음으로 나왔습니다.
▲具=공의회 후 한국에서도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 모두가 사상적으로나 교계제도에 대한 자세 및 사명의식에 있어 상당한 어떤 변화가 있었다고 보는데 박신부님께서 좀 … .
▲朴=무엇보다 공의회는 선교하는 교회의 본질을 다시 찾아「세계 안에」「세계를 위한」교회가 되자는 것이 전반적인 방향이었고「세계와의일치」를 위한 방법으로 대화를 내세웠습니다.
교회는 시대의 표시를 잘 발견하고 식별하여 좋은 것은 인정해 주고 타종파나 모든 철학이나 사회적 경제적 모든 가치를 인정해 주고 권장하고 참여해야 하며 마지막 의미와 가치는 그리스도 안에서 발전되고 완결된다는 것이 공의회가 교시한 근본 사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교계제도는 권위주의와 명령 일변도인 파라밋트형의 종적 관계에서 공동사목 형제적 일치를 되찾는 횡적 관계 체제로 접어 들었다고 보고 싶습니다. 조직과 제도 중심에서 신비체의 발견 즉 성령의 발자취를 각자 안에서 발견해 주고 인정해 주는 원(圓) 중심적인 대화형의 교계제도가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수도자들도 세상 안에서 세상을 위하는 자세를 가다듬는 노력을 하고 있고 특히 교계제도의 권위주의에 의해 미성년 취급을 받으며 제2선에서 명령을 받고 추종하는 상태에 있던 평신도를 성인(成人)다운 존재로 끌어 올렸습니다. 다양화하는 세상 안에서 적극적인 사목을 할려면 평신도의 참여의식이 강화돼야 하고 세상문제에 있어서는 평신도가 제1선에 서야 하기 때문입니다.
▲具=이제 성직자와 수도자 평신자의 의식 구조와 교회 생활의 변화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십시요.
▲吳=①결의권이 어디 있으며 어느 정도 분배돼있느냐 ②평신자와 성직자의 구분은 어느 정도로 하느냐 ③세상과 교회의 관계에 대해 신자들의 행동이나 의식이 어떻게 달라졌나, 이 세 가지 면에서 고찰해 보겠습니다. 먼저 결의권 분배는 실제로 행동으로 많이 변했어요. 공의회 후 세계 주교 대의원회의(시노드)가 생기고 지방 주교회의가 생겼는데 이는 교황권을 주교에게 넘겨준 행동적인 변화입니다. 사제평의회ㆍ교구 평협이 생긴 것은 주교의 결의권이 사제나 평신도들에게 내려온 증거이고 또 본당에는 사목위원회가 있어 본당 신부의 권한이 평신도에게 내려 갔어요. 이렇게 위에 뭉쳐 있던 결의권이 아래로 내려와 분배됐습니다. 수도회에서도 참사회 같은 것이 있어 원장의 권한이 재분배됐고 생활에도 많은 변화가 있는 걸로 압니다.
그리고 70년 4월부터 71년 6월까지 서강대 산업문제연구소가 실시한 종교 사회 조사 결과를 보면「하느님 앞에 성직자 평신자가 동등하냐」는 질문에 성직자는 80%, 신학생과 수도자는 81%가 긍정했고 본당 회장과 대학생은 78% 72%로 긍정률이 상당이 높긴 하나 성직자 수도자보다는 적었습니다.
「평신도가 매사에 성직자의 지도를 받아야 하나」라는 질문에는 성직자가 7%, 신학생이 8%, 수도자는 10%가 긍정했는데 평신도가 오히려 긍정률이 높은 편이었으나 일반적으로 낮았어요.「본당 재정을 신자들이 알아야 하느냐」는 질문에는 80~90%가 긍정해서 참여의식이 강했어요. 신자의 활동 중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전교이고, 사회 발전과 평화를 위한 일은 둘째로 중요하다고 응답했으며 교회는 종교적인 일만 해야 한다. 즉「사회 참여」에 반대하는 입장은 신부와 신학생이 30% 평신도는 40%가 넘었어요. 그러나 공의회 후 사회 참여의식이 강해지고 결의권 분배가 많아진 것은 사실입니다.
▲朴=거기다 한 말씀 보충한다면「결의권은 교계제도에 둔다. 마지막엔 주교다」이 원칙엔 변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신부 측엔 참사위원과 신부 평의회가 있고 평신도 측엔 사목위원회와 사도직 협의회가 있지만 모두 자문기관으로 돼 있어 아무리 토론해도 결의권이 없어요. 본당에서 마지막 결의권은 신부에게 있는데 그렇다고 독재를 쓰느냐 하면 목자가 모든 양의 소리를 듣는다는 입장에서 대화의 자세로 모든 것을 참작합니다. 여기서 묘한 압력이 생길 수 있고 잘못하면 혼란 상태에 빠질 우려가 있으니 대화를 잘 해야지요.
▲吳=두 가지 사상이 완전히 융합이 안 돼 있는 거지요. 굉장한 시간을 두고 두 가지가 합친 새로운 제도가 생성될 것입니다.
▲朴=개신교에선 완전히 민주주의입니다. 장로들이 목사에 대한 임명권도 있고 결의권도 있거든요. 그러나 우리는 교황 주교 신부, 이렇게 내려오고 그것을 신자들이 받아들이고 있어요. 성경과 교리의 변화 없이는 완전한 민주제도로 될 수 없을 겁니다.
▲具=교계제도의 변화도 의식 구조의 변화를 통해서 전개돼 나가겠지요.
▲吳=민주주의를 해야겠다는 의식 하나로만 안 될 때는 불만이 많아져요. 한쪽에선 쇄신이 안 돼 불만, 한쪽은 자꾸 바뀌니까 불만, 변화의 시기에는「문화의 충격」이랄까. 불만이 강하고 부작용이 있는 겁니다. 두 가지 이유로 냉담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고.
▲朴=발전 진보 진화해 가는 과정에서 전통적인 위치에 남아 있는 사람과 진취적인 입장에 있는 사람 사이에 갈등이 있기 마련이지요.
▲具=그런 것을 완전히 갈등 관계로만 봐서도 안 될 것 같습니다. 각 계층 사이에 대화가 잘 이뤄져 조화 있는 교회 운영을 하는 것이 이상적이라 봅니다.
▲吳=경기도 소사본당에서 지난 11월에「이상적인 본당 운영 방법」을 조사한 바 있는데 평신자만이 해야 한다는 사람이 2% 신부와 평신도가 공동으로 해야 한다가 66%, 신부 혼자서 해야 한다가 14%였고 재정 운영 면에서도 비슷한 결과가 나왔습니다.
▲具=전례 면에서나 의식 구조 면에서 실제로 어떻게 달라졌습니까?
▲朴=옛날에는 희생과 제물 쓰라린 십자가만 상기시켰는데 요즘엔 축제다, 식탁에서 아버지를 모시고 형제들과 만나는 사귐의 광장이다. 이런점을 강조하는 자세로 변하고 있어요.
▲吳=전례는 ①참석자의 믿음 느낌ㆍ태도 ②참석자와 하느님의 관계 참석자 상호 간의 관계 참석자와 전례 주도자와의 관계 및 태도의 표현으로 나타납니다. 전례는 이 두 가지 면에서 달라질 수 있는데 먼저 표현되는 형식이 고정돼 있느냐 자발성이 있느냐 종적인 관계와 평등 관계가 어느 정도 강조되느냐에 달려 있어요. 전에는 형식이 상당히 고정돼 있었고 자발성이 거의 없었습니다. 공의회는 이 자발성을 인정, 즉흥적인 믿음이나 느낌을 즉흥적으로 표현하도록 용인했어요.
공의회 후 이런 면으로 상당히 발전하여「신자들의 기도」같은 것도 만들어 넣거나 빼곤 합니다. 그리고 관계 면에서 보면 하느님을 가운데 모심으로써 종적(縱的)인 관계가 상당히 약해졌습니다.
▲朴=그런데「바티깐」공의회가 있었다니까「쇄신」보다도「개혁」으로 접어들었고 흔동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쇄신은 근본 정신부터 회심해서 형식이 나중에 따라와야 되는 건데 덮어 놓고 개혁한다 해서 외적 조직적 기술적 전례적 변화만 일으키면 다 되는 줄 알고 있다는 점이 있어요. 공의회 후 근본적인 변화는 교회론인데 그것은 의복보다 몸을 강조한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부분인 신비체의 원리 원칙을 알아서 하느님과 인간 간의 신비로운 사랑의 유대 관계를 캐치하기도 전에 외적인 변화부터 도입시킨 것 같아요. 아까 말한「문화적인 충격」때문인지도 모르죠. 통상문 예전 책이 자꾸 바뀌고 무엇 때문에 바뀌는지도 모르고 지엽말단의 문제를 가지고 혼미를 빚다 보니 근본정신을 전혀 모르는 사례가 많은 것 같습니다.
▲具=지금이라도 우리 교회에서 공의회 정신에 대한 올바른 계몽이 교회 내에서 활발히 전개돼야겠어요.
▲朴=예, 특히 교회론에 대한 계몽이 필요합니다. 모든 근본적인 변화는 교회론에서 나와요.
▲具=이제 그러면 공의회 정신이 대외적으로 어떻게 실천돼 나가는지 알아봐야겠는데, 교회 재일치 운동이 어떤 상태에 있으며 그 전망은 어떻습니까?
▲吳=일치헌장을 보면 교회의 공식적인 입장이 많이 변했어요. 개신교에 대해 구속사업상 굉장히 큰 의미와 중요성이 있다고 했고 성령이 그들을 구원의 도구로 사용하고 있다고도 했습니다.
또 비그리스도교, 즉 불교 힌두교 마호메트교 유태교 등을 존경한다면서 그러한 종교들이 지닌 참되고 거룩한 것은 무엇이든지 받아들이겠다고 천명했습니다.
상당히 새로운 태도지요. 그리고 한국의 신자들이 타교를 보는 눈을 보면「천주교를 믿지 않으면 구령을 못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신부 2% 신학생 5% 수녀 1%만이 그렇다는 겁니다.
평신도는 10%가 넘고요.「교회 분열의 책임은 어디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 천주교와 개신교 양측에 다 있다는 사람이 신부가 91%이고 다른 사람들도 81%가 넘어요.「비가톨릭 신자에게 하느님이 은총을 주느냐」에 대해서는 평신도와 성직자의 80~85%가 긍정합니다. 신자들이 타종교를 배척하는 의식이 거의 없어졌음을 알 수 있죠.
▲具=일치문제와 관련하여 토착화 문제에 대해 박 신부님께서 …
▲朴=한국의 문화적 배경을 보면 들어온 지 2백 년 된 크리스챤니즘 이전에 5백년 간의 유교, 그 이전에 1천5백 년간의 불교, 그 전에는 샤마니즘이 바탕이 되었습니다. 교회는 2백 년의 역사를 갖고 모든 것을 독선적으로 무시해 왔는데 앞으로는 우리를 길러낸 배달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존중하고 토착화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봅니다.
▲具=공의회 문헌 중 비그리스도교에 관한 교령에는 아까 말씀하신 대로 기독교 이외의 종교들에서 옳고 성스러운 것은 모두 존경할 뿐 아니라 존중하고 고취시키는 데 도와야 된다고 돼 있습니다. 이것은 토착화 문제를 거론하는 데 상당히 중요한 근거가 되는데 우리나라의 불교와 유교는 비그리스도교에 속하는 종교도 되고 문화 전통도 됩니다.
▲吳=토착화에 대한 문제는 납득이 잘 안 돼 있는 것 같아요. 불교ㆍ유교 등 전통적인 종교는 인간관이 우리와 달라 그걸 바탕으로 토착화하기엔 어려움이 많고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아직 장궤가 절로 변한 것 등 지엽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것 같습니다.
▲具=동양에는「天」사상이 많이 있고 특히 공자의 사상 속에는 많습니다. 선험적인 진리를 갖고 있다 할까요. 孝의 사상도 기독교와 소통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불교에는 또 영원을 보는 신앙이 있습니다.
불교는 인도에서 유교는 중국에서 들어온 것이니 다 외국서 들어온 종교이요. 여러 가지 면에서 불교와 유교는 기독교와 소통하는 점이 많습니다. 가톨릭의 의식과 겉꾸밈이 한국 사람답게 되었더라면 토착화의 전망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조시대 실학파 학자들이 천주교인 서학을 도입하면서 과학과 민본주의를 연구하지 않았습니까? 이런 좋은 전통을 가진 천주교가 토착화하지 못하고 외국 종교로 남아 있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吳=여기 천주교의 당면문제 순위를 조사한 것이 있는데 26개의 당면과제 중 토착화 문제는 19번째로 제기되더군요.「무엇부터 토착화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는 ①조직 ②재정 ③음악 ④장례 의식 이런 순서였고 빵과 포도주는 토착화 문제로 등장되지도 않았어요.
▲朴=긴급성을 따져서 19번째가 되겠지만 중요성은 딴 문제라 봅니다. 비신자가 가톨릭 교회에 들어와보면 남의 나라에 온 것 같다고 해요. 우리는 배달민족의 전통ㆍ핏줄ㆍ잠재의식을 의식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吳=제가 말씀드린 것은 신자들의 머리 속에 토착화에 대한 문제의식이 그 정도였다는 것을 지적한 겁니다.
▲具=교회가 토착화하지 못한 것은 심각한 문젭니다. 사실 이 문제는 중요하고도 긴급한 문제라 생각합니다. 교회에 외국적인 요소가 많이 느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조시대 천주교가 들어올 때부터 공의회 정신과 같은 진취적인 면을 고려했다면 이미 토착화됐을 것이고 겨레의 복음화 양상도 전혀 달라졌을 것입니다.
▲朴=한국 교회 초창기에 제2차「바티깐」공의회 정신이 있었다면 교회는 박해 없이 성장 발전돼 왔을 거예요.
▲具=우리 문화를 과거부터 채택해 왔으면 자연스러운 융합이 됐을 것입니다. 토착화 여하에 종국적인 복음화의 성공 여부가 좌우될 것 같습니다. 이제 사회 참여 문제로 넘어가겠는데 먼저 오 신부님께서 … .
▲吳=일반적으로 사회 참여의 개념이 다른 나라와 달라요. 비(非)동조적인 행동, 즉 반대를 할 때만 사회 참여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동조를 해도 사회 참여를 하는 겁니다.
교회가 단체로서 대변자를 통해 지지나 반대하는 발언을 할 수 있고 개인적으로 할 수도 있어요. 비동조적인 집단적인 행위만 사회 참여라고 보는 것은 너무 편파적입니다.
▲朴=사회 참여할 때 좀 구분하고 싶은 게 있어요. 사회 참여는 첫째 평신도에게 속하는 분야이고 성직자는 평신도와 협력해서 사회 속의 평신도와 그리스도적인 알맹이, 영신적인 문제의 지침을 집어넣는 것이 본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전문 분야가 아닌 부분을 건드림으로써 참다운 참여가 안 돼요. 물론 교회의 사명을 볼 때 정의와 사랑에 입각한 윤리와 정신적 분야에 대한 성언을 우리가 해야겠지만 구체적이고 전문적인 분야는 전문가에게 맡겨야 합니다.
▲具=원칙론에 있어서 두 신부님 말씀 다 옳은데 비동조직인 자세로 사회 참여를 보는 것은 후진적인 한국 사회의 특수성 즉 가톨릭의 진리와 정의와 근본적으로 위배되는 요소가 있기 때문에 비동조적인 태도를 취하게 되고 그것이 한국뿐 아니라 현대 세계에 두드러진 현상은 체제에 있어서 권력의 비대현상이 너무 심하기 때문에 개인의 무력이 말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진리에 입각한 정의와 자유와 평화를 지향하는 사회를 구현하는 것도 복음화의 일부분이므로 그 기본 정신에 따라서 구체적이고 행동적인 방식으로 사회 참여하는 것도 의의가 있고 가치도 있다고 봅니다
▲吳=둘 다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교회가 단체적으로 지적한다든지 반대한다든지 … . 교회가 압력단체로서 행동하면 뭔가 수정이 되고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때가 있지요. 그러나 그런 현상은 상당히 일시적인 현상이 될 수 있습니다.
오랜 시기를 통해 사회 전반을 변화시키는 데는 그런 행동으론 안 된다고 봐요. 장기적인 결과를 내는 것은 개인적인 사회 참여이고,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합니다.
▲具=장기적인 해결책을 생각할 땐 사회 참여는 어디까지나 평신도의 책임 분야이고, 교회는 유능한 평신도를 길러야 되며 사회문제에 관여할때는 교회는 원리적인 지향점만을 제시해야 하고 그러한 점이 원칙적인 문제이겠지요. 그런데 교회가 일부이나마 행동적으로 나가게 되는 경우는 한국에서 정신운동으로서의 조직체가 없고 그 정신운동의 조직체 중의 하나가 교회일 수가 있을 것입니다.
▲朴=평신도라고 해서 개인으로만 참여해서는 안 되니 평신도끼리 당을 조직해도 좋습니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의 말씀을 걸고 나온 교회는 일시적으로 변해 버리는 것에 그만 말려들 위험을 경계해야지요.
그래서 집단적도 괜찮고 개인적도 괜찮으나 어디까지나 평신도들이 구체적으로 들어가서 연구하고 그리스도 정신으로 행동하는 식이어야 해요.
▲具=가톨릭의 사회 참여 행동은 사실은 한국에만 있었던 일이지만 라띤 아메리카의 까마라 대주교가 지휘한 것을 봐도 살벌하고 과격한 행동일변도로 나가 버리고 말 것이 아니라 자연법적 양심과 정의 그것을 실현하는 토대로서의 자유, 이것만을 원칙적으로 실현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구체적인 문제도 좋은 지향으로 잘 돼 나갈 것이라는 데서 출발하고 있습니다.
그런 것이 가톨릭의 사회 참여 운동의 본심이랄까 충심일 것입니다.
▲朴=그런 것이 충심임엔 틀림없지만 이에 따라올 수 있는 위험성을 지적한 것뿐입니다.
▲具=마지막으로 바람직한 교회상에 대해서 한 말씀씩 덧붙여 주십시요.
▲吳=전 세계 교회와도 관계가 있지만 우리 교회는 계획성이 약해요. 전국적으로는 안 되더라도 교구별로 어떤 목표와 계획을 세워서 본당이나 교구 전체가 밀고 나가야 되는데 그런 계획성이 없어요. 그리고 명령하달식보다도 상의하고 공동으로 결의하는 교회가 바람직합니다. 옛날에는 교육 받은 사람이 적었지만 지금은 다르지요. 사회도 복잡해지고 하니 인재를 활용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또 교회가 어떤 계획을 가지고 행동한 것을 조직으로 평가하고 자체 비판을 할 수 있는 기구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는 그런 교회상도 보여 줘야 합니다. 사회에 대한 교회의 PR도 너무 부족한 것 같아요.
▲朴=양적인 교회보다 질적 향상을 가져오는 교회가 돼야 한다고 봐요.
초대교회의 모습을 되찾는 사랑으로 일치되는 교회의 모습이 필요합니다.
한 본당에 사천 오천 명이 모여서 지옥 가기 싫어 미사에만 참여하는「주일신자」로 끝나는 신자가 대부분이 아닙니까? 그러니 조직적으로는 교회의 반상회 같은 적은 무리의 그룹을 만들어 현대적 사랑과 일치를 맛볼 수 있고 체험할 수 있게 하고 이런 세포가 모여 본당을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具=오랜 시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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