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시보가 지령(紙齡) 제1천호를 맞게되었다니 … 』참으로 감개가 무량하다. 일간(日刊) 신문이라면 3년만 지나면 지령 1천호쯤 간단히 도달되는 숫자겠지만 처음에는 월간(月刊)으로 출발하여 9년간은 한해에 12호씩밖에 호수가 올라갈 수 없었고 그다음 월2회(月二回) 발행으로 중간하게 되었지만 여러가지사정으로 매월 2회 발행을 제대로 못하여 사실상 월간이나 다름없는(年16회 내지 18回) 발행을 했던 괴로운시대가 약10면. 이렇게 1960년 1월 주간(週刊) 신문으로서 첫호인 제210호까지 이르는데 무려 19년의 세월이 걸렸으며 1933년 5월부터 1949년 3월까지 폐간되었던 공백기 16년을 합산하면 주간이 되기까지만 실로 30여년의 적지않은 세월이 흘렀다.
제210호 이후 주간신문으로서 1년에 50호의 지령이 꼬박꼬박 쌓여올라가도 1천호까지는 16년2개월이 걸려야했던 것이니, 1927년4월「가톨릭시보」(天主敎會報)가 탄생한 후 49주년이 되는것이다.
그동안 제호(題號)를 바꾼일도 두번이나 되어 1952년 12월「천주교회보」제1백호기념 모임에서『천주교회보라는 이름은 너무 소극적인 인상을 주므로 대외적으로 더욱 가톨릭진리를 전파하기 위해서「가톨릭신문」으로 제호를 변경하자』는 다수의 의견을 따라 제호변경허가를 공보부에 신청했던바『일간신문이 아니므로「신문」이란 이름을 사용하지말고 신보(新報)로 하라』해서 1953년 3월(제122호)부터「가톨릭新報」가되었다.
1953년8월『주간과 순간(旬刊) 등 정기간행물의 표제호(表題號)는「신문」과「시보」라는 표제를사용하지못한다』는 법규변경에 따른 정부통첩에 의하여 제호를「가톨릭시보」(時報)로 다시변경 하는 것과 함께 주간(週刊)으로 증간할것도 신청하였으나 표제변경만 허가되어 1954년 1월(제137호)부터 현재의 이름으로 불러왔다.
제호별 발행 회수는「천주교회보」121호「가톨릭신보」15회「가톨릭시보」864회 이렇게 1천호가된 셈이다.
창간후 약반세기 세월에 일본의 총독부 치하 식민지시대 19년과 6ㆍ25전란으로 사무실도 책상하나도없이 원고뭉치를 들고 이집저집으로 돌아다녀야 했던 약4년의 잊지못할 시절도 있었고 주간신문이 되기까지 제1차의「각별변경 허가신청서」제출에서 6년5개월만에 허가서를 받게되었던 그간의 안팎사정과 여러 에피소오드도 있거니와 자가인쇄소와 출판사를 각이 경영해야했던 운영사정 등등 사연도 많았다.
많은 이야기꺼리중 고생스럽기는 했지만 교회와 국가를 위해서「가톨릭시보」가 제 나름의 이바지를 했다고 추억되는 일은 1950년6월 북한공산괴뢰군의 남침으로 서울의 가톨릭출판이 모두 정지되어「경향잡지」가 1954년 복간되기까지 약 4년간의 가톨릭시보가 한국의 유일한 가톨릭 정기간행물로서 반공의 이론투쟁과 계몽, 가톨릭시즘과 가톨릭문화를 알려주는 사명을 홀로 떠맡아야 했던것이다.
당시 발행부수 6천5백부중 2천부는 군종신부들의 전교용으로 또 5백부는 결핵요양소와 병원 등에 배부되고 4천부는 수속지구(收復地區)의 일부지방과 경상남북도 일원의 각 본당에 배부되었는데 타블로이트판 4면의 작은 지면이었지만 당시는 국내의 모든 신문이 용지와 인쇄시설 사정으로 타블로이트 2면 또는 4면을 발행하고 있었고 발행부수도 일간신문의 경우도 2만부가 많다고 했던때라「가톨릭시보」는 종교신문중에서도 가장 높은 수준의 내용과 많은 독자를 특히 종군신부들은「가톨릭시보」를 고대하고『시보에서 강론재료를 얻는다』고 했다. 그러나 실무종사자들은 사무실도 책상도없이 동가식 서가숙(東家食 西家宿)의 신세였으니 6ㆍ25전 대구 주교좌성당 구내의 사무실 건물은 군용으로 책상까지 징밭되고,「시보」의 인쇄국을 겸하고있던 주교관 구내의「대건인쇄소」는 공군본부 인쇄소로 징용되어「공군순보」국방정훈국의「정훈주보」등 군의 간행물인쇄로 붐비었으므로「시보」를 위해서는 사무책상 하나도 놓을자리가 없어 1953년봄 제27육군병원(前 성 유스띠노神學校舍) 남쪽건물 2층에 반한간을 얻게될때까지 필자의 3간짜리 오막집이 사무소 구실을 해온 청빈이었지만 한국교회의 유일한 정기간행물로서의 사명감때문에 우리 동인(同人)들은 일반의 몰이해와 무관심의 외로움속에서도 춥고 배고품을 견딜 수 있었다.
또하나 기억되는 일은 1955년 9월 14일 대구 매일신문사 피습사건때 일이다. 「대매(大每)」의 날카로운 비판이 몹씨 비위에 거슬렸던 자유당정권은「애국단체연합회」이름의 테레분자 수십명을 추럭에 실어다가 백주(白晝)에 신문사 공무국시설을 파괴함으로써「한주일이상 계속 신문발행을 못하면 자동적폐간(廢刊) 처분」이되는 신문법규를 이용하여「대구매일」을 없애버리려 했던것인만큼 인쇄사설이 파괴된「대매」를 다른 인쇄공장에서 찍어내도록 버려둘리는 없었다. 이날은 또 9개월전에 서거하신 최덕홍 주교의 뒤를이어 대구교구장으로 임명된 서정길 주교의 축성식 전날이었는데 필자는「축하준비위원회」이름으로 발행하고 축하식전에서 배부할「교권과 주교」라는 소책자의 제책된 것을 챙기는 등 밤늦게까지 가톨릭시보 사무실에 있었는데「대매」편집부국장인 김상윤(金尙潤)씨와 공무국장 양남춘(楊南春)씨가 찾아와서 신문발행을 계속하도록「가톨릭시보」의 공무국인「대건인쇄소」를 빌려달라는 요청이었다. 그러나 당신의 시보사와 대건인쇄소관계는 복잡했다.
즉「대건」은 교구청과 오용진(吳龍鎭) 교수의 합자로 1949년 9월부터 가동된 공장인데「대건」은그때 3개월전부터 많은 부채로 휴업중으로 가톨릭시보를 인쇄할때만 시보사에서 임시공을 불러다가 일을 시켰으나 공장관리에 대한 권리는 없었으므로「대매」의 요청을 바로 응락할 수 없는터라『되도록 주선하겠다』는 약속만해서 보내고 즉시 인쇄소 사장인 오창수(吳昌洙)씨에게 연락하였던바 오씨는 경찰의 압력과 뒷일을 걱정하여 겁을 내고 쉽게 응답을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또 주교축성식 준비사무로 바쁘신교구경리 강빠스칼 신부님에게 사정이야기를 하고 공장문 열쇠를 주교관에 갖고 오도록 명령케했던 것이다.
이렇게해서 대구에 있는 많은 어느 인쇄공장에서도 신문을 찍을 수 없었던「대구매일」은 위협과 공갈의 공포분위기 속에서도 죽지않고 살아남게 되었으며 이로인하여 권력과 폭력에 대항하여 언론이 승리한 계기가 마련되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러한 사실은 세상에 알려지지않았으나「가톨릭시보」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마음흐뭇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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