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표징」은 저자 로마노 과르디니가 가톨릭 신자들로 하여금 전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10년 간에 걸쳐 모은 자료를 엮은 것으로 분도출판사에서 곧 책자로 출판하게 됐다. 전례를 통한 하느님과의 만남에 보탬을 주고자 본보는 역자 장익 신부와 분도출판사의 호의로 이를 소개키로 했다. <편집자註>
장미가 한 송이 곱게 피었다. 어제까지도 수줍게 봉오리만 짓고 있더니 어느새 살며시 피어 있다. 주옥 같은 이슬 방울 하나하나에 이른 아침 햇살이 고여 있다. 꽃잎에도 새벽이 물들어 있다. 새로움 그것이다.
그것을 누가 와서 싹뚝 베어 갔다. 병에 꽂아놓고 한동안 보더니 곧 싫증이 났는지 아궁이에 넣어 버렸다.
불이 이렇게 잠깐 사이에 하는 일을 세월은 끊임 없이 모든 산 것에게 하고 있다. 잎이 무성한 고사리에서부터 날씬한 코스모스, 몇 아름씩 되는 느티나무까지도 다 마찬가지다. 가볍게 나풀대는 나비도 그렇게 날쌘 제비도 그렇다.
재빠른 다람쥐도 육중한 황소도 다름없다. 상처로든 병으로든 불에 타서는 굶주려서는 꽃 피었던 모든 생명이 언젠가는 재가 되기 마련이다. 또렷하던 모습은바람에 이리저리 날리는 한줌 재가되고 영통하던 오색은 거무스레한 가루가되고만다. 그토록 따르하게움트던 민감한 생명이 저메마르고 죽은 흙 아니 흙만도 못한 재가 되어 버린다.
우리라고 다를 바 없다. 우리도 열린 무덤 안에 놓인 해골 곁에 한 줌 재라도 보면 얼마나 소름이 끼치던가.
「사람아 명심하라. 너 흙이고 흙으로 돌아가리라」
그렇다. 재가 말하는 바는 바로 무상(無常)이다. 다른 것들의 무상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무상을 말해 준다.
우리의 무상, 나의 무상. 봉재에 들어서면서 며칠 전 성지주일만 해도 푸르렀던 가지의 재로 십자를 내 이마에 그으면서 사제는 바로 나 자신의 덧없음을 깨쳐 준다.
「사람아 명심하라. 너는 흙이고 흙으로 돌아가리라」
모두 재로 돌아간다. 내가 사는 집, 내가 입은 옷, 쓰는 그릇, 내 돈, 밭과 들과 숲, 나를 따르는 개와 외양간의 짐승까지. 지금 글씨를 쓰는 나의이 손, 그걸 읽고 있는 눈, 나의 온 몸이 모두 재로 돌아간다. 내가 사랑하던 사람, 미워하던 사람, 그리고 두려워하던 사람들. 이 세상에서 내게 커 보이던 것, 작아 보이던 것, 하찮아 보이던 것, 모두 재로 돌아간다. 모두, 모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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