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누구나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온갖 불안과 고통 속에 허덕이고 있으며 마침내 죽음이란 미지의 수수께끼에 봉착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복잡한 생활 속에서도 한 번은 인생의 의미에 대해 물음을 던지게 됩니다. 우리를 이토록 궁지로 몬 고통과 악은 어디서 왔는가, 죽음을 넘어 참된 행복을 구가할 영원한 나라는 없는가 하고 말입니다.
숱한 사상가 신학자 과학자 철학자 문학가들은 저마다 이 물음에 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인은 하느님의 모습대로 지음을 받은 인간임을 믿고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은 존엄한 신비의 존재이며 이웃에게 자신을 열어야 할 존재입니다. 시편 8을 지은 시인의 말을 빌면 인간이란 하느님의「사랑하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교부 이레네오는 인간은 하느님을 보는 데 그 목적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바로 하느님 앞에 선 인간의 조건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과 인간을 이어주는「사랑의 길」은 쉽게 무너지고 있습니다. 기원 전 3세기 중엽, 코헬럽이란 성서 저자가 쓴 작품에 지금 우리의 번민이 그대로 실려 있습니다.『헛되고 헛되다. 모든 것이 헛된다』하고 외친 코헬럽 (전도서)은 인생의 무상과 부조리 앞에서도 끝내 좌절하지 않고 하느님 대전에 승복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고통과 번민 중에 숨어계신 듯한 하느님의 숨결을 느끼기까지 무서운 내적 투쟁을 벌인 희망의 인간이었습니다. 우리도 지금 격동의 시대에 놓여 있습니다. 개인뿐 아니라 사회 전체가 고통을 당하기도 합다. 따라서 우리는 존재의 근본적인 문제에 부딪치며 비애와 실망 속에 젖어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직 부조리와 환멸뿐,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는 법과 제도는 항용 우리를 노예로 만들고 있습니다.
사회 안에 만연돼 있는 부정과 부패, 앞사람을 밟고 오르지 않으면 안 되는 생존 경쟁 이 모두는 성현들이 권장해온 지혜와 덕행과 예의를 무색케 합니다. 이성(理性)을 자랑으로 삼는 현대의 지식인들도 온갖 좌절에 부딛쳐서 지식의 헛됨을 동감하기로 합니다. 코헬렐은 시편 73의 시인과 더불어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내 발은 아슬아슬 헛디뎌지고/걸음은 비실비실 넘어질 뻔하였으니/어리석은 자들을 시기한 탓이로다. /악한 자가 잘 되는 꼴을 바라보면서/미상불 그들은 아무 고생도 없이 몸뚱이는 피둥피둥/살쪄 있도다/인생의 고초란 겪지도 않고 남들처럼 고생도 하지 않기에/교만은 그들의 목걸이요 폭력은 그 입은 옷이로다. /내 마음을 깨끗하게 보존하고 죄 없게 손 씻은 것이/허사였던가? /쉴새없이 얻어만 맞고/날이 새면 받는 것이 책벌일 바에야』
외인은 불행하며 악인은 행복합니다. 우리의 현실은 사필귀정의 원리를 무시합니다. 오늘날의 코헬렐도 이러한 현실을 보고『모든 것이 헛되다』고 한탄할 것입니다.
현대의 우리 코헬렐들은 인간이 내세우는 제가치관에도 비애를 맛봅니다. 우리 주위에는 자기의 직분을 망각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법이 차지해야 할 자리에 범죄가 있고, 의인이 들어설 자리에 죄인이 버티고 있습니다.
그리고『유다의 판관은 그릇되고 판단하고 예루살렘의 왕은 늙고 우둔하기 짝이 없다』(전도 4ㆍ13~16)고 생각합니다.
지방 장관들도 계급의 고하를 막론하고 뇌물수수에 급급하고 있으며 가난하고 힘 없는 자는 아무에게도 도움 받을 길이 없습니다(전도 5ㆍ7). 착한 행실, 근면한 노동, 윤리적인 덕행도 아무 보상 받을 길이 없습니다(전도 8ㆍ8~9). 오늘을 쳐다본 코헬렐도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이 세상에 행해지는 또 하나의 헛됨이 있다. 그것은 의인들이 악인들의 행실에 따라 대접 받고 악인들이 의인들의 행업에 따라 대접 받는 부조리이다. 그러나 그것 역시 헛되고 헛되다』(전도 9ㆍ11) 개인의 능력이 제 아무리 빼어나도「줄타기」에 실패하면 인정 받을 길이 없습니다. 죽음은 모든 것을 허무화시키며 현자와 우둔한 자를 가리지 않고 덮칩니다. (전도 2ㆍ12~16) 조상 대대로 물려 받은 가치관이 경멸의 구석으로 몰리고 있으니 코헬렐과 같이 역겨움만 느낄 뿐입니다. 무관심과 허탈의 유혹에 저항할 기력마저 잃고 있습니다. 삶의 허무함을 보고 헛되다고 부르짖던 코헬렐의 외침에 공명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인생의 종막이 죽음이라는 것을 빤히 알면서도 이를 눈가림하고 없는 양 헤멥니다.
인간의 우매함이란 이 지상에서 자기가 나그네라는 점을 잊으려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코헬렐은 자기 자신이 처한 위치를 솔직하게 고백하여 인간의 경험 세계의 한계점을 파헤쳤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참된 희망이신 하느님을 적나라한 우리의 모습을 통해 보아야 합니다. 일종의 속임수에 지나지 않는 인생의 헛된 우상을 파괴한 폐허 위에서라야「숨어 계신 하느님」이 드러납니다. 인간이 하느님을 믿고 그분에게만 희망을 둘 때 하느님을 계시하는 탁월한 자가 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잃고 잿더미 위에 앉아 있던 욥에게도 산다는 것이 하나의 의무요 고통이었습니다. 우리도 욥과 같이 우주와 역사 사이의 비극적인 부조화(不調和)를 체험하며 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존재는 뿌리채 흔들리고 우리의 인생관은 촛점을 잃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욥이나 코헬렐과 같이 이 모든 비극의 책임을 하느님께 전가시키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한 시인의 입을 빌려 이렇게 호소합니다.『내가 가장 사랑하는 덕은 신앙입니다. 이 신앙은 희망입니다. 하느님께 희망을 걸어야 합니다. 하느님을 신앙해야 합니다. 신앙과 희망은 형제지간입니다』
예수께서는 우리보다 더한 고통과 실망을 체험하셨고, 마침내 십자가에 못 박히기까지 하셨습니다. 자기가 태어난 날까지 저주하던 욥은 겸허하게 자기의 위치를 발견하고는 오히려 하느님을 찬미하였습니다. 우리도 갖가지 고통과 좌절로 점철된 현실에서 절망을 딛고 희망을 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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