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복 직후 6ㆍ25의 전운이 아직 피난지에 짙게 깔려 있을 때 집이 궁금하니 보고 오라는 외할머니의 심부름으로 나는 민가도 없는 산길을 걷고 있었다.
그러나 2㎞ 전방에 집을 두고 군인들의 검문을 받게 되었고 전시중이라 동네에 들어갈 수 있을 때까지는 함께 밥 짓고 물 긷는 부대생활이 시작되었다.
하기야 돌아가봐야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어디론지 떠나버린 집에 냉정한 외할머니만 계실 뿐이어서 열네 살의 어린 나이로는 차라리 부대가 덜 외로운지 몰랐다.
어느날, 군인 한 분이 심부름을 가다 운명을 결정 짓는 일을 벌였으니 부대 근방에 있던 지뢰가 깔린 밭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었다.
요란한 폭음과 허공에 뜬 몸 - .
며칠 후 부산 아동동 병원에서 정신이 들었을 때는 오른편 어깨와 얼굴에 붕대가 감겨져 있었다.
나는 두 눈을 잃은 것이었다.
맹인이 된 것이다 …
이렇게 되어 대구 맹아학교에 입학하여 피난지의 어려움 속에서나마 열심히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편안한 바보보다 고생스러운 선비가 되자고하신 선생님 말씀대로 노력에 노력을 더한 결과 중학교를 졸업할 때는 전교의 모범생이 되어 우등상을 차지할 수 있었다.
그 후 오전에는 국민학교 학생을 가르치고 오후에는 고등학교 과정을 배우는 교생으로 나는 한층 학업에 열을 올렸다. 생각하면 실명한 것이 오히려 다행이랄까. 눈을 잃지 않았다면 어디서 무의미한 생활을 하고 있을지도 몰라 나의 학생 시절은 퍽이나 행복하고 희망에 찬 한때였다.
더구나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미국 양부모의 주선으로 도미하여 대학에 입학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호사다마라던가. 맹아학교 교장은 수익에 눈이 어두웠던지 느닷없이 맹아학교를 폐쇄하고 일반대학을 설립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한참 피 끓는 청년 시기에 의문이 솟구쳐 올라 교장에 대한 불신임장을 내고 동맹 휴학을 주도하게 되었다.
그 결과 맹아학교는 무사히 유지되었으나 주동이 된 나와 몇몇 동료들은 퇴학을 당해야 했다.
나는 너무 절망이 되어 열차에서 뛰어내릴까도 생각했으나 두 손도 없는 맹인이 기차 안에서 열심히 연필을 팔고 있는 것을 보고 다시 힘을 얻기 시작하였다. 그 길로 외할머니를 찾아 서울에 정착하였고 학교에서 배운 침과 뜸으로 생계를 유지하며 차차 수입이 늘어가던 어느날 친구로부터 편지가 날아왔다. 적당한 여자가 있으니 결혼을 하라는 편지였다. 할머니의 권유대로 우리는 전격적으로 결혼을 했고 청주로 내려가 맹아학교에서 교편을 잡게 되었다.
그러나 해가 바뀔수록 아내의 불미스런 행동이 드러나 도저히 교직 생활을 지속하기 어려워 사표를 내자 아내는 말 한마디 없이 행방을 감춰버렸다.
나는 모든 것을 청산하고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그러던 어느날 청주에 재직할 때 조력해 주던 이양이 찾아왔다.
대학 입시에 합격하여 등록하러 왔다가 잠깐 들렸다는 이양은 실의에 빠져 있는 나를 데리고 남산으로 교외로 나가자며 위로해 주는 것이었다.
그런데 고향에 다녀온 이양은 너무도 뜻 밖의 이야기를 꺼내고 있었다.
결혼을 하자는 것이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여러 가지로 설득을 하였으나 막무가내로 결혼을 제안해 오는 이양을 거절하지 못하고 말았다. 염치없는 짓이며 희생의 멍에를 지워주는 줄 번연히 알면서 나는 이양과 결혼을 한 것이다.
가족 친지들은 몰려와 아우성 치고 이웃이나 외할머니의 비난도 그칠 줄 몰랐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사는 법여! 철없는 것이 일시 들떠 결혼하자고 나섰으면 달래서 보낼 것이지 뭐요?
그래 이 병신아! 한밤중에 안마 피리 삐삐 불면서 지 장님 남편 손 잡고 동네를 헤메고 댕겨? 안 된다 안 되야, 난 그 꼴 못 본다 못 봐!』
모든 반대에도 이양은 굽히지 않아 우리의 결혼생활은 지속될 수 있었으나 당장에 다가온 것은 생활의 위협이었다.
정말로 우리를 비난한 가족의 말처럼 나는 저녁 9시만 되면 골목을 누비며 안마 하라고 피리를 불고 아내는 언제나 내 손을 잡거나 내 대신 피리를 불고 있었다. 그 슬픈 피리 소리 …… 남의 귀한 집 딸을 데려다 이렇게 못할 짓을 하게 하다니 나는 죄책감에 떨며 다시 아내의 손을 잡는 것이었다.
그러나 안마가 신통치 않아 아내는 직업 전선에 나서기 시작하였다. 보험회사 사원에서부터 비듬약과 책의 세일즈맨, 번데기와 떡복기 장사까지 무슨 일이건 한 푼이라도 더 벌어보려고 새벽부터 밤까지 뛰어다니는 것이었다.
나는 맹인으로서는 견뎌내기 힘든 군고구마 장수로 나서 고구마인지 차돌인지 구별을 못해 새까맣게 손바닥을 데우기도 했다.
봄이 되자 아내는 첫딸을 들쳐 업고 손수건 행상에 나섰다. 나는 하는 일마다 신통치 않아 부산으로 내려가서 온천장의 안마사로 일했으나 도둑누명까지 쓴 아내와 나는 영도다리 위에서 죽음을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아내는 다시 한 번 재기할 것을 제의했고 수원과 한남동에 정착하여 휴게실의 안마와 뜸을 맡을 수 있게 되었다. 더구나 장모님은 우리가 세든 집을 사서 관리하게 하심으로써 우리의 결혼을 인정해 주시는 것이었다. 그러나 시련은 다시 닥쳐와 나는 교통사고로 다리를 다쳐 자리에 눕게 되었다. 다쳐도 이만큼이나 다쳐서 뇌나 생명에는 지장이 없으니 이보다 더 고마울 데가 어디 있느냐는 아내의 말에 나는 문득 아내의 달덩이 같은 얼굴을 보는 듯하였다.
『일어설 수 있으면 힘껏 뛰겠어. 안마피리 불고 뜸 뜨는 것 … 지금까지 한심하게 여겼지만 이젠 아냐. 난 어떤 궂은 일도 하겠어』
아닌 게 아니라 교통사고는 내게 전화위복이 된 셈이었다. 약간의 보상금과 비축했던 돈으로 불광동 쪽에 자그마한 집 한 채를 장만할 수 있었던 것이다.
41호 화장품 아줌마가 내 아내의 애칭이다. 나는 이 애칭을 들을 때마다 한 번도 보지 못한 아내의 환하고 인자한 얼굴을 상상한다. 지금은 나이도 나이니까 주름도 잡혔겠지 … 그 주름이 불구인 나를 위해 패인 주름이라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기도 하고 경건해지기도 한다.
아내는 어리석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게는 하느님 다음 가는 존재다. 감사하는 마음을 다 바친다 해도 어찌 그 은혜에 보답할 수 있을 것인가 … .
아직 다리가 불편해서 쉬고 있지만 앞으로 물리시술 면허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어서 빨리 일을 할 수 있게 되어 아내의 수고를 조금이라도 덜고 싶은 마음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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