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이 발바라는 서울에서 출생하였고 성격이 굳세고 또 대단히 총명한 여자였다. 불과 네 살 되던 신유년에 큰 박해가 일어나 아버지가 순교한 후 어머니와 한가지로 열심 수계하였다.
18세 때 한 외교인이 발바라에게 구혼해 왔으나 그의 어머니가 허락하지를 않았다. 그래서 이로 인한 시비가 분분하였으나 발바라는 이러한 이의를 용감히 물리치고 교우와 결혼하였는데 이가 바로 그보다 한 달 늦게 순교하게 될 박아오스딩이다. 남편도 역시 순교자를 배출한 열심한 가문의 후손이었다.
부부 한가지로 계명을 충실히지켰다. 궁색한 살림 중에서도 그들의 화목함을 보고 모든 이가 타복해마지 않았다. 삼남매를 낳아 슬하에서 모두 열심한 신자로 키웠다. 이렇게 발바라는 아버지가 피로 견고케 한 신앙을 이어받아 자기 가정을 크리스찬 가정의 모델로 만들었다.
유신부의 입국을 계기로 하여 성사를 잘 준비하여 받은 후로 열심을 배가하였다. 남편의 회장 직무를 거들었고 자기 자신도 냉담자를 권면하고 무식한 교우를 가르치며 가난한 이를 위로하고 병자를 간호하는 데 전심하였다.
기해년에 박해가 일어나자 남편은 즉시 피신하였다. 8개월 만에 집에 돌아온 남편은 결국 9월 20일 포졸에게 발각되어 잡히고 말았다.
평소에 박해 얘기를 들을 때마다 무서워하던 발바라였지만 일단 속히 잡히기를 원할 뿐더러 자원할 생각마저 갖게 되었다. 그러나 자원할 사이도 없이 남편이 잡혀간 바로 이튿날 그의 소원대로 포졸의 손에 잡혔다. 이때 그는『이 은혜를 어떻게 보답할꼬! 감사하며 위주 치명하자』이렇게 혼자 말을 하며 마음을 굳게 먹었다.
포청의 감옥에서 다시 만난 부부는 이 같은 은혜를 주신 천주께 감사하고 서로 축하하며 바야흐로 열린 고난의 길을 같이 용감히 걸어가자고 서로 격려하는 것이었다. 부부 한가지로 문초를받고 고문을 받았다. 부부 한가지로 용감히 형벌을 인내하며 감수했다. 남편과 함께 여섯차례에 걸쳐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팔과 다리를 쓰지 못할 지경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발바라는 화평한 안색으로 끝까지 이겨냈다. 10여일 후에 형조로 보내졌다.
형조에서도 살이 떨어지고 뼈가 드러나 유혈이 낭자했으나 종시 굴복하지 않았다. 남편과 한가지로 사형 선고를 받은 후 하옥되었다.
발바라는 말하기를『평상시에는 치명이란 말만 들어도 무섭더니 성신의 은총으로 저 같은 극악대죄인을 도우심으로 이제는 겁도 안 나고 도리어 기쁘다. 죽는 것이 이렇게 쉬운 것인 줄은 전에는 몰랐다』고 하며 평온하고 기쁨에 가득 차 죽을 날을 기다리며 하루에도 몇 번씩 그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것이었다.
한막달레나는 원래 외인가정에 태어나 장성하여 권 진사의 후처로 들어갔다. 권 진사는 문장과 명필로 당세에 유명한 사람이었는데 중년에 이르러 천주교로 개종하고 임종시에는 대세를 받고 선종하였다. 유가족으로는 부인 외에 어린 딸이 있었다.
권 진사는 생전에 아내에게 입교를 권고하였으나 임종 마당에서도 재삼 부탁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남편의 유언을 따라 수계를 타당히 하려는 의도에서 막달레나는 어린 딸 권아가다를 데리고 교우집에 붙어 지냈다. 이 집은 막달레나네보다 더 가난해서 여기서 막달레나 모녀가 겪어야 했던 비참과 고통은 이루 표현키 어려운 것이었다.
딸이 차차 장성하여 열세 살이 되었을 때 시골의 한 교우에게 출가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미 혼례식을 올렸음에도 불구하고 남편이 가난하여 자기 아내를 데려갈 수 없게 되니 막달레나는 부득이 딸을 데리고 사위의 친척이 정하상의 집에 와 있게 되었다. 유 신부가 입국하여 정하상의 집에 거처하게 되자 모녀는 신부를 극진히 모셨다. 그러나 미구에 딸과 신부 사이의 나쁜 표양으로 이 집을 나와야 했다.
그러는 동안에 박해를 맞았다. 6월 7일 들연 포졸이 집을 습격하고 모녀와 딸의 친구 이아가다를 모두 붙잡아 갔다. 이상하게도 어머니만 포청에 가두고 두 아가다는 사관청에 구류시키는 것이었다. 그것은 유다스 김여상의 짓이었다 왜냐하면 얼마 안 되어 김여상이 사관청에 와서 포졸과 함께 하여 두 아가다를 꾀어 도망시켰기 때문이다.
임금이 이 사실을 알고 포장을 파직시키고 수직하였던 군졸을 사형하거나 귀양 보냈다.
이 사건의 결과로 한막달레나는 일층 가혹한 형벌을 받게 되었고 발에는 하꼬까지 채워 엄하게 수직하였다. 뿐만 아니라 교우 10여명이 새로 잡히게 되었고 막달레나만이 아니고 옥중의 교우들이 모두 삼엄한 감시를 받게 되었다. 도망했던 두 아가다가 다시 잡혀 들어오자 포장이 모녀를 잡아들여 지난 사건과 관련하여 더욱 간혹한 형벌을 가했다. 그러나 종시 굴복하지 않으므로 형조로 이송되어 사형 선고를 받았다. 11월 24일 동료 5인과 한가지로 참시 치명하니 그때 한막달레나의 나이는 56세였고 고발바라의 나이는 42세였다.
발바라는 순교하는 순간에도 저 무한한 천주의 은혜를 감사하고 기뻐하며 칼을 받았다고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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