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2년 병자의 성사를 청하는 집으로 신부님과 함께 자전거를 타고 전속력으로 달려갔다. 방문을 여니 병자는 열 시간 이전에 이미 죽은 상태였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니 동공 속에 미미한 생명이 안간힘을 다해 붙어 있었다. 급히 서둘러 조건사죄경과 병자의 성사를 주자 동공이 그제야 서서히 풀렸다. 사제를 기다리는 초인적 집념이 이제 안도감으로 바뀌어 편히 쉬는 것이다. 남편은 출타 중이었고 남매간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는데 약을 먹은 후라 자는 줄만 알았다는 것이다.
망자는 눈을 감겨주고 촛불을 켜자 신부님은 땀에 범벅이 되신 채 침묵 속에 오래오래 기도하셨다. 그 간절한 기도의 자세 속에는 목자의 애끓는 소청이 넘치고 있었다.
기도하는 모습보다 더 아름다운 모습이 또 있을까! 석고상처럼 머리에서 발끝까지 완전 부동이 되어 겸허하게 일념으로 비는 모습. 그것은 웅대한 심포니일 수도 심산유곡의 메아리일 수도 있다.
같은 해 고실이라는 공소에서 가설 제대를 뜨락 위에 차려 놓고 초가 추녀 끝에 십자고상을 걸어 놓고는 마당 위 멍석 자리에 앉아 있는 신자들을 향해 미사를 드린다. 종이에 쓴 강론 내용을 서툰 발음으로 낭독한다. 미사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산골 신자들은『아멘』소리만 요란하다.
호롱불 주위에 모여들 앉아 교리를 듣고 나면 밤은 무르익는다. 때 묻은 이불을 신부님과 함께 덮고 누우면 절절 끓는 방바닥 온기로 피로가 덮친다. 밤새 뒤척이며 둘둘 휘말아 덮고 잔 이불 속에서 깨어보면 어느새 아침. 오늘 또 30여리 떨어진 다음 공소로 향해야 한다. 짜고 매운 김치와 텁텁한 된장찌개의 조반상이 나오면 내게는 시골의 정취마저 느껴지지만 외국인 사제에게는 고역의 시간일 법한데도 단 한 번의 불만의 표정도 짓지 않는다. 아무리 살펴봐도 이국 땅에서 바쳐지는 그런 희생의 대가로 요구되는 우월감마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어느날 호젓한 산길을 함께 걸을 때 물어보았다.『신부님, 한국 땅에 오셔서 정말 수고가 많으십니다. 않을 수도 누울 수도 먹을 수도 없는 괴로움 잘도 견디십니다』그러자 조용히 웃으면서『인간적인 입장에서 생각하면 무모한 생활인지 모르지만 신앙으로 생각하면 아주 다르지요. 제가 한국에 와서 단 한 사람에게라도 영생을 얻게 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백 번이라도 한국에 나올 것을 주저하지 않겠습니다.』
순간, 나는 많은 사실을 발견하였다. 그 한마디 말에는 영생을 향한 웅지가 있었고 영원에 도전하는 자만 없는 정열이 있었다. 비로소 전교사의 길이 아름다운 길임을 뚜렷이 이해할 수 있었다. 많은 이에게 봉사하노라는 어설픈 자만심보다 단 한 사람에게라도 영생을 주고 싶다는 구체성이 나를 이렇게도 감동시키는 것이었다. 왜 일찌기 단 한 사람을 위해 죽기까지 할 더 사실적인 생각을 할 수 없었을까.
많은 영광을 입고 싶어하는 속된 습성 때문일 것이다. 단 한 사람을 위해서도 철저하지 못한 주제에 많은 이를 구한다는 설익은 감상이 부끄러웠다. 하나를 위한 완전한 헌신이야말로 만을 위한 헌신일 것이다. 하나는 곧 만이기 때문이다.
그 신부님이 성 베네딕또 대수도원 초대 아빠스가 되신 것은 그 단 한 사람을 볼 줄 아는 축복된 정신에 대한 보상이었으리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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