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토요일 강론에서 과연 희망이 가능하다고 천명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무엇보다 신앙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구원활동을 믿고 믿음의 공동체인 우리 교회에 참다운 생명을 주시는 것을 믿는 일은 희망 못지 않게 중요합니다. 우리는 새 계약의 속죄자이신 예수께서 가지고 오실 하느님의 왕국을 믿고 바라고 갈망해야 합니다.
그러나 어둡고 침울한 현실 생활에 부대끼다 보면 믿음을 잊기가 쉽습니다. 이같이 고통은 믿음의 장애 요소가 되기도 합니다. 아무 까닭도 없이 고통에 시달리게 되면 하느님으로부터 버림을 받는 듯한 생각도 가지기 쉽습니다.「히로시마」의 원폭 투하, 월남전쟁, 6ㆍ25동란 … 이러한 전쟁은 죄 없는 어린이 부녀가 노인까지 무차별 학살합니다 역사상 무수한 사람들이 가난하게 태어났다가 이름 없이 죽어갔습니다. 지금도 숱한 선의의 사람들이 부조리에 악의 세력에 의해 희생되고 있습니다. 어느 누가 이 비극을 정당화시킬 수 있습니까? 하느님의 모습을 따라 창조된 인간이 왜 이토록 부조리하고 무자비한 고통의 제물이 돼야 합니까? 하느님은 인간의 죄를 벌하기 위해 이러한 비극을 허락하고 계신다는 말도 있습니다.
그러나 고통의 신비를 알아듣기에는 너무도 미흡한 답변 같습니다. 이 같은 고통과 불의에 항거하지 않고 죄 때문이라고 안이하게 회피해 버린다면 그 신앙은 인간적인 신앙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 신앙이라면 참된 희망조차 발견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무신론이나 공산주의에 빠져 버린다면 그것도 해결이 아니라 도피일 것입니다. 하느님을 떠나서는 아무도 썩어 없어질 인간 자체 내의 부조리를 설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고통에 대한 항의는 유신론과 무신론을 넘어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문제 삼고 있습니다.
우리는 왜 고통을 당해야 하나? 이 물음에 대해 전통 유신론은 하느님의 거울인 이 세상에 인간의 자유를 무시한 어떤 악이 들어왔다고 한탄만 하고 있습니다. 한편 전통적인 무신론은『신이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유일한 답변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신을 제거하고 스스로 운명을 해결한다고 자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상에서 이 세상의 고통을 보십시요! 우리의 고통을 멀리하고 계신 것이 아니라 참여, 아니 짊어지고 계십니다. 신앙은 그리스도의 고통과 수난이 낳은 결실입니다.
그렇다고 우리의 신앙은 고통을 정당화시켜 주지는 않습니다. 고통의 문제를 해결해 주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우리의 고통을 십자가상에서 부르짖던 예수님의 외침과 더불어 헛된 것이 아니라 의미가 담긴 것임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당당하고 멋지게 돌아가신 것이 아닙니다. 고통과 번뇌 속에 이그러진 모습을 하고 돌아가셨습니다. 시편 22의 첫 귀절『하느님/내 하느님/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하고 외치신 마르꼬 15장 34절만 보아도 잘 알 수 있습니다. 시편 22는 억압 받던 한 시인의 노래입니다. 이 노래는 억울한 고통에 잠긴 수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노래였습니다. 히틀러의 개스실로 끌려가던 6백만 유대인들이 읊은 최후의 노래로도 유명합니다.『숱한 개들이 나를 둘러싸고 악한 무리 이 몸에 에워쌌나이다/그들은 내 손과 발을 묶어 죽음의 재 가운데 이 몸 누였나이다/내 뼈는 마디마디 셀 수 있게 되었어도 그들은 익히 보며 좋아라 나를 보며/저희끼리 내 겉옷을 나눠 가지고 내 속옷을 가지고 제비 뽑나이다』(17~19절)이 시인은 감옥에 갇혔던 예레미아와 같이 옥중 생활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고발해 주시고 있습니다.
시인은『나는 사람도 아닌 구더기 … 』하고 외쳤습니다. 정신적 고통 또한 육체적 고통 못지 않게 이 시인을 괴롭혔습니다. 고독과 소외와 좌절, 이 엄청난 고통은 어디서 왜 생긴 것입니까? 물론 직접적인 원인은 당신의 사직 당국과 불의한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온갖욕설을 다 뱉았습니다. 하느님께 희망을 두었으나 외면 당하는 것만 같았습니다.『하느님 내 하느님, 어찌 나를 버리시나이까 … 밤새껏 불러 봐도 알은 채 아니 하나이다』(2~3절)
애 끓는 시인의 절규는 여기서 그 절정을 이루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인류 역사 전체의 고통을 대변한 이 가련한 시인의 절규를 결코 외면할 수 없습니다. 이사야 53장의「수난 받는 종」을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는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듯 그 종의 모습을 그대로 취하셨고「구디기 천더기 조롱거리」(시편 22ㆍ7)가 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시편 22의 가난하고 억울한 시인의 절규를 그대로 실천하셨습니다. 그 절규는 성부의 버림을 받고 죽기까지 하셨던 그 사랑의 신비를 계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수난은 인류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의 결실이며 예수님의 부활은 그 사랑의 승리요 극치입니다. 이와 같이 사랑이 없다면 우리의 신앙 또한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신앙은 오직 십자가상의 절규와 수난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그리스도도『어찌 나를 버리시나이까?』하고 외치셨는데 하물며 우리야 더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언제나 예수의 죽음을 스스로 체험하면서 예수의 생명이 우리의 몸에서 드러나게 해야 합니다.『나는 믿었다. 그러므로 나는 말하였다』라는 말이 성서에 기록돼 있습니다.
우리는 같은 믿음의 정신으로 믿고 또 말합니다. 그것은 예수를 다시 살리신 분이 예수와 더불어 우리도 다시 살리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 금요일의 기도 시편 22는 그리스도의 기도이기에 더욱 중대합니다. 이 시는 고통을 당하고 경멸을 당하던 그리스도의 수난을 교회가 참여할 것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시편 22는 또한 하느님의 백성이 바치는 기도이며 투쟁과 고통에 몸부림치는 인류 전체의 신앙과 소망을 집약하고 있습니다. 이 믿음을 통한 희망은 사도 바오로의 말처럼 세세대대의「신음하는 교회」에 주어졌습니다.『한 지체도 고통을 당할 때 모든 지체도 아파하지 않습니까?』(꼬전 12ㆍ16)하신 사도 바오로의 말씀을 명심합시다.
신앙은 가능합니다. 주 예수와 더불어 가능합니다. 신앙은 용기를 잃지 않습니다. 그래서 신앙은 투쟁합니다. 신앙은 또 항구합니다.
특집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