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정말 하느님을 믿는다면 우리에게 대한 하느님의 애틋한 사랑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고 가슴 뭉클한 감격을 체험할 때「내일」이란 우리를 불안하게 만드는 미래가 아닙니다. 그때는「하느님의 왕국」이 가져올 부활의 때이며 영원한 생명의 때입니다. 그것은『하느님이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신 나머지 당신의 외아들을 보내주셔서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요한 3ㆍ16)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죽음에서 살리시어 우리에게 미래의 보증으로 주셨습니다. 이는 우리가 누리게 될 영원한 생명의 상징입니다. 이토록 하느님의 사랑은 지극합니다.
사랑을 받아보지 못하고 성장한 사람은 남에게 사랑을 주기도 힘들고 받기도 힘든다는 것이 요즘 심리학의 정설입니다. 따라서 소외와 좌절 속에 자라는 우리 현대인에게는 하느님의 사랑이 믿어지지 않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도대체 그러한 사랑이 가능할까 하고 자문해 보기도 합니다. 멜로 드라마 속에 끊임없이 오르내리는 사랑의 얘기들, 그 통속적 사랑의 눈은 하느님의 순전(純全)한 사랑의 얘기를 얼마나 흐릿하게 만드는지 모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신앙인들만이 하느님 사랑의 이야기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아버지 하느님의 말씀을 들고 형님이시요 오빠이신 예수님으로부터 하느님 사랑의 이야기를 듣고 믿습니다. 예수님은 성부께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아버지! 안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것을 감추시고 오히려 철부지 어린이들에게 나타내 보이시니 감사합니다』(마태오 11ㆍ25)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겸허하고 가난한 마음을 가진 신앙인들, 어린이가 된 우리들에게는 하느님 사랑의 이야기가 눈물겹도록 감격적인 러브 스토리가 되어주고 있습니다. 요한은 묵시록(3ㆍ20)을 통해 하느님의 말씀과 요구를 이렇게 들려줍니다.『들어라. 내가 문 밖에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도 나와 함께 먹으려 다정하게 마주앉을 것이다』이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하느님은 우리와 사랑하는 벗까지 되고자 하십니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우정이며 우정은 사랑을 전제로 한 우정입니다. 참된 우정은 사소한 이해관계를 초월하며, 여기에는 이성(理性)이나 합리가 들어와 좌지우지할 입장도 못 됩니다.
그러나 성서의 줄기찬 사랑의 흐름을 보면,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친구 이상의 것을 요구하시어 우리와 연인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대변인인 예언자들을 통하여 이같이 열렬한 사랑을 원하십니다. 에제키엘서와 호세아서 등을 보면, 하느님은 우리를 아름다운 한 부부와 같이 우리를 사랑해 주셨으며 시편 8의 노래에서와 같이 인간은 연인인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로 만물의 영장의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사랑은 비극적인 드라마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토록 사랑을 받던 인류가 하느님을 외면하고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에제키엘을 통해 하느님은 말씀하셨습니다.『아! 너는 오만한 여인이 되었으니 … 네 미모에 사로잡힌 나머지 거리에 나서서 매음부가 되었다 창녀가 된 인류, 이것은 성서의 직설적인 표현입니다. 하느님은 인류가 자기를 잊어버리고 권력과 지배와 황금과 우상의 노예, 그리고 간음녀가 되었다고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버리게 되면 별 수 없이 우상을 섬기게 됩니다. 그 우상은 정치적 이데올로기도 좋고 금력도 권력도 좋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주신 석탄과 석유와 원자력을 가지고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살생과 정복의 도구를 삼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하느님이 주신 지성을 어디에 사용하고 있습니까? 오히려『하느님이 없다』고 말하기 위해 사용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이때 하느님의 분노가 폭발합니다. 그 분노는 남편이 아내의 부정을 목격한 분노와 같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충격을 받은 만큼 우리의 연인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나를 잊어버렸기 때문에 간음죄를 범한 자와 같은 형벌을 내리겠다.
그 형벌은 살인자에게 내리는 벌과도 같은 것이다』하느님의 이 준엄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은 우리가 계속해서 우상에 고집하리라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어조는 다시 인자한 아버지 다정한 어머니의 애정 담긴 모습으로 바뀝니다. 역설적이지만 사랑에 굶주린분은 우리가 아니라 하느님이기 때문입니다. 호세아 예언자를 통해 하느님은 말씀하십니다.『나는 내 분노의 불길에 따라 보복하지 않으리라.
나는 너를 파괴하기 위해 되돌아오지 않겠다 … 』거룩하신 하느님은 인류의 끈질긴 고집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호소하십니다.『잠에서 깨어나라. 너는 제발 일어나라. 포로가 된 너, 인류야 일어나라. 노예의 포승을 끊고 일어나라』
호세아 예언자는 인간의 사막에 놓인 날에야 하느님께 응답할 것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 목 마른 사막의 길이란 바로 십자가의 길입니다. 십자가의 그 피 흘림은 밀알 하나가 썩어 많은 열매를 맺듯이 부활과 영원한 생명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인류 역사 속에 악의 세력이 범람해도 은총과 사랑의 힘으로 영원한 천상 예루살렘을 향해 돌진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위해 수난하신 주님의 처절한 모습을 그려보는 사순절, 우리는 그 사랑의 숨결 어느 한 줄기도 잃지 않도록 기도해야겠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의 사랑을 두고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누가 감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놓을 수 있겠습니까? 굶주림과 헐벗음이 그럴 수 있겠습니까? 혹 위험이나 칼이 그럴 수 있겠습니까?』(로마 8ㆍ31~39) 행복하여라,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여기에 응답하는 사람들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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