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가톨릭 교회 역대 교황들 중 삐오 12세만큼 혼란과 무질서의 세계사 속에서 교회를 이끌어온 주역도 드물다. 삐오 12세가 교황으로 재직한 1939년~1958년은 교회 외적으론 제2차 세계대전과 더불어 전후 복구문제가 가장 시급한 때였으며 내적으로는 급격히 생성하는 새로운 사상들을 통합, 교회의 진로를 재정비해야 하는 어려운 시기였다.
그러기에 삐오 12세가 교황좌에만 앉아 있기에는 시대가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
그는 뛰어난 신학자며 교회법학자로서 수 개 국어를 구사하는 탁월한 용변가로서 당시의 어느 외교관이나 정치인 못지 않게 세계와 교회를 위해 자신을 송두리째 바쳐야만 했다.
교황 삐오 12세는 1876년 3월 2일 에우제니오 파첼리란 이름으로「로마」귀족 집안서 태어났다. 아버지 팔립 파첼리는「바티깐」의 변호사였으며 어머니 비르지나아 그라지오시는 여후작 출신이었다.
「로마」에서 국민학교를 졸업한 후 14살에 신부가 될 것을 결심한 파첼리는 고레고리안대학과「아폴리나리스」의 교황청 학당에서 신학을 전공한 후 2개의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어 1899년 4월 2일「로마」의 성마리아 대성전에서 신품성사를 받은 그는 계속해서「아폴리나리스」에서 수학을 계속, 교회법과 민법 박사 학위도 받았다.
사제가 된 2년 후인 1901년부터 파첼리 신부는 교황청 국무성의 중요 직속기구인 특별교회사무성성에서 그의 출중한 교회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1905년에는 몬시뇰로 임명됨과 동시 교회법전의 개혁과 재편찬 작업에 협력하고 같은 해에「아폴리나리스」의 법학 교수로도 임명됐다.
그 후 35세의 약관으로 동성성 차관에 임명되고 얼마 후에 장관에 올랐다.
특히 1914년 6월 24일 파첼리 몬시뇰은 교황청과 세르비아 간의 조약을 체결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바로 이 조약의 체결은 오스트리아의 페르디난드 대공이 암살당하기 4일 전에 이루어졌으며 그 이후의 사건은 제1차 세계대전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됐다.
1차대전 동안 파첼리 몬시뇰은 교황 베네딕또 15세를 도와 피난민들과 농민들을 돕는 일에 헌신한다. 1917년 4월에는 독일「뮌헨」교황 대사로 임명됐으며 5월에는 지금의 터키인「사르네스」의 명의 대주교로 서품됐다.
독일 주재 교황청의 주석 대표로서 그는 독일 정부가 전쟁을 빨리 중단하도록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독일 황제 빌헬름 2세에게 교황의 평화 제안을 제출했으나 이 제안은 불행히도 독일과 프랑스 양국 모두 받아들이지 않았다.
전쟁이 끝나갈 무렵「뮌헨」에서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폭동이 터져 수차의 위협을 받으면서도 그는 그곳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다 1918년의 독일혁명으로 바이마르공화국이 선포된 후 베네딕또 15세는 1920년에 그를 수도「베를린」의 교황 대사로 임명했다. 그러나 그는 당시「뮌헨」에서의 교황청과 독일 간의 조약 체결에 관한 외교관계로 인해 25년까지「베를린」에 상주하지 못했었다.
급기야 1925년에 와서 바바리아국과 29년에 독일 공화국과 교황청과의 조약을 체결하는 데 성공한 그는 12월 9일「로마」로 복귀했다.
「로마」에 돌아온 지 7일 만인 1929년 12월 16일에 추기경으로 서품된 그는 이듬해에 교황청 국무성 장관에 취임했다.
국무성 장관으로서 파첼리 추기경은 독일ㆍ오스트리아 콜롬비아 등과 조약에 체결을 완료하고 인도ㆍ리투아니아ㆍ일본ㆍ핀란드ㆍ자유중국 및 중동의 레바논과 이집트 등과도 문호를 개방했다.
뿐만 아니라 파첼리 추기경은 교황청의 대표로 전 세계 각지를 순방했다. 34년의「부웨노스 아이레스」와 38년의「부다페스트」만국성체대회에 교황 특사로 참석했으며 35년 프랑스「루르드」에서의 성년(聖年)에 교황 삐오 11세의 대표로 파견됐다. 또 36년 11월에는 미국을 방문, 루즈벨트 대통령과 회담하기로 했다.
미국 방문을 마치고「로마」에 돌아왔을 때 교황 삐오 11세는 그를 가리켜『대서양을 횡단한 범미국 추기경』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교황청 국무성 장관으로서의 눈부신 활약 외에 파첼리 추기경은 1935년에 교황 서거시 추기경들을 대표하는 추기경 단장으로 임명됐다.
1939년 2월 10일 교황 삐오 11세가 서거하자 파첼리 추기경은 추기경 단장으로서 차기 교황 선출을 위한 회의를 3월 1일에 소집했다. 전체 62명의 추기경들 가운데 교황 후보로 파첼리 추기경이 가장 물망에 올랐다.
선거는 2일 하루 만에 끝났다. 첫 번째 투표는 아무런 결과 없이 끝났으나 두 번째 투표에서는 40표의 찬성을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는 1명을 제외한 추기경 전원의 찬성을 얻었다. 파첼리 추기경은 바로 교황으로 선포되고 삐오 12세란 이름으로 교황좌에 올랐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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