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는 사회생활과 함께 생겼지만 실상은 개인적으로 개인의 신체상의 안전이나 정신상의 안정(安靜)을 위해서도 결코 무시할 수 없습니다.
종교적인 동물임에도 틀림없습니다. 종교는 믿음으로 시작되며 믿음은 약한 데에서 비롯합니다. 옛날엔 천재지변(天災地變)의 엄청난 힘과 암흑과 불과 바람과 이의 불가항력적 위력 앞에 무력(無力)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없었던 것이지요. 차차 그것은 인간의 내면(內面)으로 심화되었던 것이 소위 다신교(多神敎)의 시작이 아닐까요?
하느님의 이름을 불러 자기를 의지하는 근대적인 종교에 이르기까지 종교는 인간에게 필수적인 것입니다. 종교를 믿고 안 믿는 것은 자유이겠지만 자기의 내부에 도사리고 있는 약한 자의 유일 수단인 의지심 즉 믿는 마음은 결코 아무도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심리적으로 말하자면 종교를 부인하는 사람일수록 종교적인 충동이 강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깊이 생각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인간을 위한다는 구실로 인간을 비인간화(非人間化)하는 사례가 오늘날 도처에서 유행하고 있는 것을 간과할 수가 없습니다. 목적과 수단이 뒤범벅이 된 것 같은 느낌입니다. 말하자면 목적 없는 수단이 없고 수단 없는 목적이 없겠지만 목적이 수단으로 전락하고 수단이 목적으로 자리바꿈을 해 버린다면 세상이 어지러워 안 됩니다.
이러한 어지러움은 먼 옛날로부터 있어 왔습니다. 그리고 이 어지러움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하여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무던히 애써 왔습니다. 그 가운데 교육의 역사는 바로 그러한 인간적 노력의 총본산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는 학교기(學校期)를 가지고 교육이란 것을 의식하겠지만 실제의 교육적 배려는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시작하여 훨씬 이후까지 베풀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유아기(胎兒期) 결혼생활의 시작으로부터 아니 배우자의 선택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가문ㆍ혈통ㆍ재능ㆍ외모ㆍ학벌ㆍ재산 등이 왜 혼인할 때 문제되는 건지 아시겠지요? 이러한 문제를 교육적 배려와 분리하고 보면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합니다.
또 사회적으로는 문화적인 활동이나 업적들을 가지고 교육을 의식하겠지만 교육은 결코 이름 붙여진 어떤 문화활동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집 안에서 길가에서 뻐스 안에서 시장에서 논밭에서 공장에서, 학교의 여가시간에 사무실 안에서 의사당에서 공사장에서 내가 모르는 사이에도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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