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ㆍ25사변으로 이 땅에 유우엔군이 주둔하게 되자 나는 부모님 곁을 떠나 미군부대의 하우스 보이로 들어갔다.
가족도 잊은 채 부대가 이동하는 대로 따라다니며 풍부한 외국 물자가 마치 내것인 양 사치스런 생활에 젖고 있었다.
18살 되던 해 봄이던가. 내가 소속되었던 부대는 본국으로 돌아가고 하우스 보이 생활도 끝을 맺게 되자 나는 갑자기 가난하고 초라한 자신을 발견하고 당황하게 되었다.
나는 범법의 늪에 첫발을 들여놓기 시작한 것이다.
55년 7월 어느 여름날 밤 석진과 나는 법원리 뒷산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실탄이 9발이나 들어 있는 미제 45구경 권총이 바지춤 한쪽을 축 늘어뜨렸다. 이따금 들리는 풀벌레 소리만이 적막을 깰 뿐 산 아래 원터마을은 아직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석진과 나는 행동하기 좋은 2시에 산을 내려갔고 낮에 보아 두었던 돈 많은 포주집 담을 넘었다.
그러나 소문에 들었던 미화 천 불은 맥주로 바뀌어 있었다.
실패였다. 할 수 없이 다른 방에서 자고 있던 미군 병사와 양색시의 시계, 목걸이 금반지를 거둬서 재빨리 포주집을 빠져 나왔다.
11시가 다 되어 갓바위 하숙집에 도착해서 방문을 연 순간 권총 부리와 함께 잠복 형사들이 나타났다.
어이없게도 범행 후 3시간 만에 체포된 것이었다.
나는 서울 지방법원으로 압송되어 일심에서 5년을 받고 김천 교도소로 이송되었다.
초겨울의 싸늘한 대륙풍이 추풍령을 넘어와 교도소를 흔들고 있었다.
우리는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운동장에서 입소식을 한 뒤 수의로 갈아입었다. 단추는 떨어지고 해진 죄수 번호 563의 수의였다.
이렇게 되어 한 덩이 주먹밥으로 저녁식사를 하고 18명이 좁은 방에 끼어 자면서 긴 수형 생활은 시작되었다.
나는 교도소 인쇄공장의 제본부에서 작업을 하게 되었다. 원래 일을 한 때는 꾀를 피울 줄 모르는 성격이어서 가르쳐 주는 대로 부지런히 일을 하였다.
그 후 6개월이 지나고 제본부 책임자가 만기 출소를 하여 공석이 되자 작업에서는 나에게 그 책임을 맡기는 것이었다.
완성된 책에 대한 출고 관계와 10명의 동료 수형자들에게 내가 배운 기술을 가르치고 감독하는 일이었다.
길다면 긴 3년의 세월이 흐른 10월 어느날, 소장의 작업장 순시가 있은 뒤에 나는 모범수로서 표창되었고 다시 재속하여 행형 성적 3급에서 1급으로 승진하여 방을 옮겼다.
그곳에서는 가능한 한 많은 특혜가 있었으니 제대로 된 침구와 넓은 방, 책상과 화병, 거울과 족자까지 걸려 있고 감방을 감시하는 교도관도 없었다.
그뿐인가. 특별 부식이 있는가 하면 작업장에서 돌아올 때의 몸검사도 없었다.
처음 1년간은 배 고픔과 추위에 얼마나 떨었던가 …
나는 동상으로 얼어 터진 발 때문에 1주간 동안 하루 한 끼를 굶으며 남에게 내 몫의 밥을 주어 양말 한 컬레를 얻을 수 있었다. 너무 배가 고파서 밥을 훔쳐 먹다 매를 맞는 사람, 드럼통 속의 돼지밥을 퍼 먹는 사람, 병감으로 가려고 잉크를 마시고는 폐결핵이라고 속이는 수형자들 … 이 참혹한 현실 속에서 나는 다시는 이런 속에 오지 말자고 얼마나 다짐했는지 … 그 후 가석방의 은전으로 교도소를 나와 어느 제책사의 공원으로 취직을 하였다. 그러나 곧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 교도소의 기술은 재래식 방법이어서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 했던 것이다. 그럭저럭 사회생활에 익숙해지면서 빠르게 일 년이 지났다. 어느날 나는 용돈이 아쉬워 재고품으로 남아 있는 몇 권의 책을 팔다 들켰다. 제 버릇 개 못 준다던가. 결국 다시 오명을 남기고 쫓겨나게 되었다. 나는 과거를 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밤이면 중앙시장에서 잠을 자고 낮에는 아낙네들의 시장 바구니를 노리는 생활 속에 어느날 김천 교도소에 함께 있던 동료 관형이를 만났다. 그는 넝마주이였다.
나는 관형과 함께 수원 쑥고개로 내려가 넝마주이 생활로 들어갔다. 그러다가 절도죄로 교도소에서 3개월 만에 또 다시 집행유예로 풀려났고 이번에야말로 새로운 삶을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부모님 곁으로 돌아갔다.
어느날 이웃집 부인은 내게 가난한 처녀를 색시감으로 소개해 왔고 맞선을 본 지 7일 만에 결혼을 하게 되었다.
다음날부터 나는 새로운 각오로 출근을 하였다. 물론 그렇게 좋아하던 술과 담배를 끊었고 아내도 불평 한마디 없이 알뜰하게 살림을 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여 3년 만에 아이도 셋을 두어 오손도손 살고 있을 때 방위 소집 영장이 나오게 되었다. 6주간의 훈련을 마치고 수색동 예비군 중대본부에서 근무하면서 나는 눈 앞이 캄캄해지는 것이었다. 중대장은 내 호소를 듣고 본부 옆에 조그마한 과자 노점을 차리도록 협조해 주었다. 이렇게 되어 아내는 젖먹이를 업고 종일 노점판 앞에 앉았고 퇴근 후에는 내가 11시까지 과자를 팔면서 겨우 연명해 나갈 수 있었다.
그동안 어떻게 알았는지 교도소의 동료들이 찾아와 갖가지 방법으로 범법행위를 하도록 유혹해 왔지만 나로서는 오직 올바르고 뼈 아프게 일해서 가족들을 지켜야 한다는 일념뿐이었다.
그 길던 방위소집이 끝나고 나는 다시 금형 기술을 익히기로 했다. 금형이란 쇠붙이를 톱으로 자르고 줄로 갈아서 정성스럽게 다듬어야 하기 때문에 인내력과 지구력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탬플을 보고 금형을 해서 물건을 뽑아 보면 신기할 정도로 물건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나는 용기를 갖고 어느 공장에 들어가 일자리를 부탁하였다. 주인은 마침 사람을 구하던 중이라 나는 잡부로 취직이 되었다. 그 후 내게 금형 기술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주인은 공장장으로 일해 주기를 청했고 따라서 월급도 많이 오르게 된 것이다.
이제 퇴근하면 여러 가지 기계와 공구나 부속품을 정돈하여 자본금이 목표액까지 도달하기를 기다리고 있다. 지금 생각 같아서는 목표액은 예정일보다 앞당겨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내 자신의 기술로 내 사업을 시작해야지 …
책상에 엎드려 숙제하는 큰놈, 라디오의 음악에 춤추는 막내, 밭에 나가 품일을 하느라 고생하는 아내를 바라보며 나는 다시 한 번 가정을 지키리라 결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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